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Nov 14. 2024

나이와 실력, 무엇이 더 중요한가?

둘 다 아닙니다, 적어도 활터에서는


원래 활터의 문화는 조선시대 때부터 양반이 주도했다. 계급이 사라진 근현대에 와서도 지배층이 활쏘기 문화를 주도하는 흐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70년대 중반 전까지만 해도 법조계, 중앙정보부, 세무계통 등의 인사들이 주로 활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 이후에 비싸고 다루기 어려운 전통활인 각궁 대신, 카본 소재로 만들어 편리한 개량궁이 등장하고, 8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 전쟁, 중동 특수 등으로 국민 전반의 삶이 나아지면서 국궁의 문턱을 넘어서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상류층들은 대거 골프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국궁의 세대교체, 아니 '계급 교체'가 이뤄진 셈이다.


1954년 경 활쏘기 풍경 (출처: 조영석 명궁, 태극산업 대표이사)


또한, 70년대 초반부터 시행된 단급제도의 도입으로 궁사들의 관심이 사풍이나 사법에 대한 존중보다도 얼마나 많이 맞혀서 높은 단증을 얻느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활터의 문화나 옛 법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얼마나 활을 오래도록 쏘아왔으며 덕망 있는 존재로 자리 잡아왔느냐보다 중요한 건 시수가 되어버렸다. 집궁執弓 경력이 얼마 되지 않아도 5단이다, 7단이다 하면 시선이 달라지고 대우가 달라진다. 본인 어깨에도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다. 올라간 어깨가 내려오지 않고 굳어버리면 급기야 활을 오래 쏘았는데도 아직 유단자가 되지 않은 자들을 속으로 비웃고 무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문제는 활터의 차원에서도 그런 이들에 대한 대우를 박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대회에 나가서 자신이 속한 활터의 이름을 빛낸다는 이유에서다. 실력만 있으면 인간성은 어지간한 바닥 수준이 아니고서야 차순위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영원한 건 결코 없다는 것이다. 한창 잘 나갈 때 9단을 따놨다면, 평생 9단의 실력이 유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처음 승단대회가 시작될 무렵에 당시 활 잘 쏘기로 이름난 광주의 임종남 접장님은 "어제 몰고 오늘 불쏘는 것이 활이야! 그걸 어떻게 등급을 매긴다는 얘기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대한궁도협회의 활쏘기 교본 <한국의 궁도>에 궁체 교본 사진으로 실린 임종남 접장(광주 관덕정)의 궁체. 그는 <한국의 궁도>의 편집자였기도 하다.  (출처: <한국의 궁도>)




시수(矢數; 활쏘기에서의 평균 성적)에 대한 자부심이 아닌, 자신의 사법(射法; 활 쏘는 방법)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진 자도 오만불손함의 한 갈래를 이룬다. 자신의 방식만이 옳고 나머진 그르다 여긴 나머지, 활터의 사범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며 말하고 다니기도 한다. 백번, 아니 천 번 양보해서 설령 자신이 맞고 사범의 가르침에 오류가 있었다고 한들, 그런 식의 존중이 결여된 사고방식과 언행은 활을 쏘는 사람으로서 권장되는 바른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저마다 활에 대한 이해도도 다르고 강조하는 지점도 다르다.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심지어 같은 사법으로 배워도 저마다 자세가 다르고, 이해도도 다르다. 같은 정보를 접하더라도 저마다 꽂히는 부분이나 가슴에 와닿는 부분이 다르고 자세를 익혀나가는 과정에서도 잘 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 저마다 활의 세기나 화살의 길이와 무게가 다르고, 신체 능력에도 차이가 있다.


맹인모상盲人摸象. 자기가 보는 세상만이 전부라 믿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또한 사법이 같든 다르든, 활에 화살을 걸고 과녁을 향해 날려 보냄에 있어서 공통되는 원리는 모두 같다.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드러내느냐에 따라 세부적인 지침이 다를 뿐이다. 중요한 건 사법 이전에 예법이고, 마음가짐이다. 타인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비아냥대는 마음에 올바른 사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사법은 사실 관계를 따질 부분이 아니라 얼마나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지녔느냐에 대한 문제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 됨됨이가 글러먹은 자에게는 가르침을 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게는 이 말이 배움에 대한 뜻으로 마음과 귀가 열린 자들은 더 좋은 배움을 얻고 그만큼 더 성장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와 같은 존재에겐 가만히 있어도 좋은 가르침들이 넝쿨 째 들어온다.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자에게도 항상 배울 점은 있다는 마인드를 갖춘 사람에겐 그 누가 와도 가르칠 맛이 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물은 변하기 나름이고, 꽃은 사시사철 피어있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오만방자하게 다니는 자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가르침도 귀에 들어오지 않으니 장기적으로 가면 예외 없이 쇠락 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다. 자업자득이요, '지팔지꼰'이다. 비단 활만의 얘기겠냐만은, 오만과 독선으로 똘똘 뭉친 자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하다. 자신만 비참하면 상관이 없는데 주변 사람들까지 피해를 끼친다. 






시수도, 사법도 아니라면 그럼 나이가 중요하다는 말이냐 하면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나이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는 것 역시 성적만 믿고 나대는 부류와 다를 바가 없다. 결국 돈이든, 지위든, 나이든, 실력이든 무엇을 갖췄다고 여기면 타인을 업신여기고 본인의 행동거지를 함부로 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지 동물이 아니지 않은가? 본능이라고 해서 그것을 사사로이 풀어놓고 다니는 것은 인간답지 못한 행위다.


본능에만 충실하느라 자신의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 활을 쏘는 모습만 봐도 그 사람이 지닌 덕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덕은 다른 말로 그 사람의 됨됨이요 그릇의 크기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지닌 어떤 것을 가지고 그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며 뽐내려 드는 마음은 궁사로서의 도리에 어긋난다. 


활터에서 중요한 것은 나이도, 실력도 아닌 올바른 인품이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며, 변해서도 안 될 것이다.





참고자료


1. <활쏘기의 나침반>, 정진명, 학민사 (2018)

2. <한국의 궁도>, 대한궁도협회 (2023)

이전 09화 활터에서의 나와 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