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예의
선례후궁先禮後弓이다. 활쏘기에서는 예절과 법도가 먼저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단지 형식에 초점을 맞춘 예절, 즉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이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활을 쏘는 마음가짐이 얼마자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말에 가깝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엇이 예의인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무엇이 내 기분을 좋게 하는지 라거나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상대를 위한 것일지, 그리고 우리(각자가 속한 활터) 모두를 위한 것일지, 나아가 올바른 활쏘기 문화 정착에 도움이 되는 길인지를 고민해야 주객이 전도되지 않은 올바른 예절의 준칙들이 추려지고 존속될 것이다.
활을 쏠 때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절반, 아니 8할은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 나머지는 껍데기다. 하지만 올바른 마음에 그럴듯한 껍데기를 갖추었을 때 나머지 2할이 채워져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 이 글은 올바른 마음과 의도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적어 내려가는, 아직은 부족한 게 많은 궁사인 필자의 견해이다.
활터가 갖는 무게가 과거에 비해 많이 가벼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활터가 지녔던 준엄한 정신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렇기에 활터를 어디 동네 놀이터 같은 곳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들 가지고 노는 살상력이 전무한 장난감 활을 가지고 노는 장소가 아니고서야 언제나 안전을 중요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활쏘기는 대大자로 누워서 한 손으로는 팝콘을, 한 손은 바지 속에 넣어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TV를 보듯이 편안하게 임하는 게 아니다.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하는 것이 활쏘기다. 타인의 활쏘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쾌적한 환경과 분위기 형성을 위해서라도 개개인이 지켜야 할 예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쾌적한 활터를 위해서 갖춰야 할 예절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보았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대하는 예절이며, 다른 하나는 타인을 대하는 예절이다.
뭐든지 마음이 먼저다. 모든 절차와 예절은 자신의 바른 마음이 드러나는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마음가짐이 바로 섰다는 전제 하에서 구체적인 실천 방침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르며, 이는 순전히 개인의 성향 차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일반적으로 따르는 기준을 가이드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단정한 복장
활터가 갖는 공간적 특성을 생각했을 때, 왜 단정한 복장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점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남은 것은 무엇이 단정함이냐에 대한 기준이다. 이에 대해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알몸으로 가서는 안 된다와 같은 누구나 동의할만한 수준에서부터 짧은 바지는 안 되는지, 그럼 7부는 되는지, 9부는 되는지에 대한 구차하기도 하고(?) 애매하기도 한 다양한 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맨발이 드러난 신발을 신고 오거나, 슬리퍼를 신고 오거나, 소음이 큰 하이힐, 너무 진한 화장품/향수 냄새, 노출이 너무 심하거나 몸매 부각이 노골적인 의상 등은 지양하는 것이 예의다. 하지만 이런 항목들을 무슨 자격증 시험 준비하듯 암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유념해야 할 마음가짐은 딱 하나다. 이거 하나면 만사가 해결된다. 내 개인적 편의를 추구하기보다 남들을 먼저 살피면 된다.
내 복장으로 인해서 대다수가 불편함을 갖거나 혹은 활쏘기에 방해를 받는다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지녔다면, 거기에서 비롯된 결과는 웬만하면 문제가 없다. 설령 가치관의 세부적인 차이가 있더라도 충분히 서로가 조율해 가면 된다. 그런 시선에서 보자면 꼭 규정에 명시된 항목이 아닌 영역조차도 본인이 알아서 예의 있는 행보를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요목조목 따지고 각종 편법을 일삼는 분들도 있다. 그것은 그런 규정을 바라볼 때 언제나 개인의 편의를 우선시 두기 때문이다. 가령, 슬리퍼를 금지한다는 조항을 보면 본인은 여름에 더운 날 편하게 신고 오고 싶은데 안된다고 하니까 '크X스'는 되겠네 하며 맨발에 크X스를 신고 오는 식이다. 민소매는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는 조항을 보고 어깨 끝에 겨우 걸친, 반팔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티셔츠를 입고 이건 민소매가 아니라고 주장한다거나. 바른 마음에서 자연스레 예의에 걸맞은 행동이 나오듯 어긋난 마음에서도 얼마든지 규정을 편한 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무한대로 펼쳐질 수 있다.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
등정례, 초시례, 팔찌동, 동진동퇴, 습사무언 등의 활터 예절에 유의하면서 활쏘기에 임한다. 즐겁게 활을 쏘든, 진지하게 쏘든 그것은 개인이 활을 대하는 개별적 목적에 따라 달리 하면 된다.
그러나 본인의 언행 하나하나가 그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최소한 흉이 되지는 않도록 늘 스스로를 살피며 활쏘기를 해야 한다. 개개인은 모두 특정 활터를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잘못된 행실 하나가 본인이 속한 활터 전체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활터가 자기 혼자 쓰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만 인지하면 이런저런 얘기들은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혼잣말이라고 해도 타인이 들릴 정도라면 조심해야 한다. 활을 쏠 때는 본인이 너무 잘 맞는다고 으스대서도 안 되며, 안 맞는다고 짜증을 내서도 안 된다. 자만의 에너지든 불만의 에너지든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테다,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이든 불평불만만 쏟아내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보다는 밀어내는 척력의 에너지를 내뿜는다는 것을.
나는 활터에서, 혹은 자주 머무는 곳에서 어떤 에너지를 만드는 존재인가?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갸륵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 그것이 근본이며, 나머지 구체적인 행실들은 사실 곁가지다. 예의의 존재가 나보다 타인을, 집단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를 대하는 예절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
양보하는 마음
같은 활터의 사원들끼리든, 외부 활터의 사원이 찾아온 경우든 간에 양보하는 마음을 갖추는 게 미덕일 것이다. 서로 먼저 인사하고, 속으로 싫은 사람이라고 해도 인사를 받아주고(뭐 당연한 말을 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기본적인 소양조차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대에 들어설 때도 서로 앞쪽 자리를 양보하는 그런 마음이면 족하다.
대접하는 마음
외부에서 방문객이 왔을 경우 반갑게 맞이해 준다. 자신의 활터의 이용 수칙 등을 안내해 주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함께 활을 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손님 대접의 지극한 절차일 것이다. 이는 특히 필자가 속한 활터에서처럼 개방된 활터의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이다. 워낙 외부 방문객이 다양하고 잦기 때문에 일일이 대응하기 어렵거나, 그럴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방정이 아니라도 해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주인의식이 너무 과해도 문제다. 외부인에 대한 과도한 경계나 텃세 역시 버려야 한다. 또한 외부 방문객을 함부로 가르치려고 해서도 안 된다. 특히 어리고 만만해 보인다는 이유로 학생이나 여성들이 주요 피해자(?)가 된다. 그들이 어디에서 활을 배웠고, 활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인지와는 별개로 그들도 엄연히 별도의 스승이 있을진대 함부로 가르침을 전하는 건 예의일리 만무하다. 특히 활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재능이 있어서 단기간에 좋은 성적을 내는 사람들일수록 기고만장해서 '가르치고 싶다'는 욕구에 빠져 결례를 범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다.
조심하는 마음
언젠가 서점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책을 본 적 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책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책 내용은 둘째치고 제목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활을 쏠 때에도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은 생각을 마치 밴드 반주의 '베이스' 음처럼 깔아 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적용될 수 있는 경우를 예로 들면, 가장 먼저 내가 외부의 활터를 방문했을 때를 들 수 있겠다. 우리 집에 놀러 온 타인을 대할 때에도 조심하는 마음이 필요한 법인데, 하물며 타인의 공간에 방문할 때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 자체가 없다면, 자신의 활터에서 경험하고 아는 것이 전부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다 보면 활터마다 다를 수 있는 문화, 예를 들어 정간 배례의 유무(필자는 개인적으로 정간 배례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연전(화살을 주우러 가는 것)을 하기까지 총 몇 순(1순당 5발)을 쏘는지 등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채 경솔한 행동을 하기 십상이다.
남의 활터에 갈 때만이 아니다. 내 집처럼 편안한 자신의 활터에서도 이 마음은 변치 않아야 한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깐. 활을 쏘기 전 이미 쏘고 있는 분들이 사대에서 내려왔을 때, 현재 몇 순째 활을 내는 중인지 확인하는 것도 예의다. 그것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비어있는 과녁에 가서 혼자 조용히, 천천히, 활을 쏘다보면 본인으로 인해 연전이 늦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대에 입장할 때에도 그냥 눈에 보이는 곳 아무렇게나 들어가는 경우가 생기기 쉽다. 카페나 식당 같은 곳에서 남는 의자를 가져갈 때에도 이미 앉은 분에게 남는 의자인지 물어보고 가져가는 게 예의 아닌가. 기존에 쏘고 계시던 분들이 당연히 먼저여야 한다. 기존 분들이 다 들어가고 나서야 본인이 들어갈 남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살피고 기존의 사람들에게 함께 습사를 해도 되겠느냐는 양해를 구하면서 조용히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해하는 마음
누구나 올챙이 적 시절이 있다. 활을 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예절이 활을 모르는 외부인들에겐 낯설기도 하다. 예를 들어 활과 화살이 신기한 나머지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행동에 옮기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벌떡 일어나 고함과 삿대질과 함께 '막만타궁이 어쩌고 저쩌고...' 권위로서 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듯한 태도는 삼가야 한다. 겉으로는 이것이 활터의 예의라며 내세워도 그것은 그보다 먼저 사람과 사람 간에 지켜야 할 예의에 어긋난다. 활터가 있기 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넓은 마음으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려주려고 하는 친절함을 겸비하자.
신독愼獨;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를 살피어 삼간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이다. 퇴계 이황이나 백범 김구 같은 선대의 위인들이 좌우명으로 삼기도 한 정신이다. 활터가, 그리고 나아가 세상이 더 좋은 곳으로 자리 잡아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늘 스스로를 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테다. 그렇게 됐을 때 개개인의 성숙은 서로 간의 배려와 존중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