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May 23. 2022

[주간단남] 5월 3주 차 아침 생각

22.05.15(일) - 22.05.21(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5.15 (일)



(..)

혼자서는 결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기에, 자신을 보살피고 그리고 이끌어주는 귀한 인연을 살면서 한 명쯤은 꼭 만나게 되는 것 같다. 

(..)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딸 머피에게 신호를 보내어 어떤 행동을 유도했던 그 장면처럼, 미래의 우리 자신 혹은 가까운 누군가가 수호천사가 되어 지금의 우리를 지켜보며 보호해 주려고, 바른길로 이끌어 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그것의 사실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은 나를 괴롭히는 쪽보다는 보살피는 쪽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런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

'이제 그만 좀 새로운 걸 써봐!' 내 안의 검열관이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이곳은 그저 내 내면의 소리를 글자로써 드러내 보이는 곳이지 창작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일관된 메시지가 계속 나온다는 것은 내가 일관된 생각을 지니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타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어떤 생각에 단순히 잠시 꽂혀있는 것이 아닌, 그것이 내 안에서 하나의 신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한 사람의 신념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모닝 페이지는 결국 나의 삶을 드러내 보이는 공간인 셈이다.

(..)

사람이 가장 순수한 상태일 때가 바로 잠들어 있을 때 아닐까.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존재하는 그 상태는 현재 그 사람의 육체적 나이와 무관한 본연적인 순수함을 자아낸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 하지 않는 상태. 이게 맞고 저게 맞네를 따지고 분별하는 그런 마음의 스위치가 꺼져 있는 상태. 육신에 머물던 영혼은 잠시 꿈나라로 여행을 갔기에 텅 빈 집과 같은 상태. 그 조용함과 평화로움이 빚어내는 순수함은 묵상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

만물은 순환의 이치를 따른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슬픔도 없다. 모든 것은 찰나와 같이 짧은 순간들이다.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나서 인생은 마치 한 마리의 나비가 꾸는 찰나와 같은 꿈과 같다고 말한 것은 인생의 순환의 이치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어떻게 사는 것이 매 순간에 충실한 삶인가? 어떻게 사는 삶이 옳은 삶인가?

이에 대해 정해진 대답은 없다. 같은 사람의 대답이라고 해도 시간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변치 않는 한 가지는 바로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기를 죽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질문에 대한 답 그 자체보다도 답을 구하고자 하는 그 태도에 삶의 진정한 의미가 깃든다. 질문을 멈추지 마라. 질문을 놓지 않는다면 삶은 계속해서 그때마다 꼭 필요한 답을 건네줄 것이다.




22.05.17 (화)


(..)

육체적 피로뿐 아니라 정신적 피로도 쌓였던 것인가. 정신적 피로는 바로 우승에 대한 집착, 못하는 모습은 빼고 잘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만들어 낸 우월감 혹은 열등감에 의한 것이었다. 나의 경우는 열등감보다는 우월감이었다. 그 둘은 생긴 것은 달라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

내 마음속 검열관은 피아노를 배우는 돈과 시간을 사치라고 말하지만 나는 애써 그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대신 피아노 선율이 주는 아름다움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연주할 시간을 낼 수 있음에, 그것을 배울 돈이 여전히 남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려 노력한다. 

(..)

나의 매일은 정말 바쁜 것인가? 아니면 허투루 낭비되고 있는 시간을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낭비보다(여기서 낭비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다만 내가 계획한 일이 아닌 것에 시간을 쏟는 것을 말한다) 더 문제인 것은 하기로 한 일을 무의식적인 상태로 임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것을, 얼마만큼 집중을 했는지가 머리와 가슴에 남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하루의 끝에서 '오늘 내가 뭐 했지?'와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는 것 자체가 그 순간들을 충실히 살아내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는 잘나고 싶다는 마음과 잘 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공존한다. 그 공존의 뿌리는 역시 같다. 시선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을 때 사람은 우월과 열등이라는 감정의 쌍둥이 형제가 만들어 내는 홍수에 쉬이 휩쓸리고 만다.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방주'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내면의 중심이다. 

내면의 중심. 말은 그럴싸하지만 그래서 정확히 그게 무엇이고, 어떻게 얻느냐는 질문에 쉽게 답을 하기가 어렵다. 나는 그런 중심이 잡혀있는 사람인가? 

(..)

어제 내가 유난히 피곤하고 기력이 없었던 이유는 술자리에서 말한 내 삶의 비전에 대해 스스로가 떳떳한지에 대해 의문이 일었기 때문은 아닐까. 남을 위한다는 그 말이 참인지, 아니 그보다는 정말 그 비전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혹은 정말 그게 내 비전이자 소명이 맞는지. 숙취도 숙취지만 그런 여러 가지 물음이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어 맨 것은 아니었을까.

(..)

그렇게 생각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조차 못했다면,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런 파도에 잠식된 뒤였다면, 내게 아직은 그런 마음의 중심이 닻을 내리고 굳건한 존재로 버티고 있지 못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

잘 천착해 보자. 그러면서 동시에 너무 깊게는 생각하지 말자. 행동 속에서 거꾸로 답이 보이기도 할 테니. 움직이고 그러고 나서 또 생각하자. 일차적으로 해야 할 것은, 내가 하는 모든 고민과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모든 발걸음들이 곧 길이 된다는 믿음을 갖는 것. 그 믿음을 원동력 삼아 계속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22.05.18 (수)


(..)

무언가를 믿는 데에 꼭 진실이 필요치는 않는 법이다. 적어도 나에겐, 나에게 펼쳐진 이 세상에는 내가 믿는 그것이 곧 진실이다. 애초에 세상이란 각자의 주관적 필터로 해석된 현상들이 겹쳐서 나타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석된 세상이 겹쳐있는 상태를 인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절대적인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립자들은 관찰자의 의도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나의 의도뿐 아니라 다른 모든 또 다른 '나(우리 모두는 각자의 1인칭 시점이 존재할 테니)'들의 의도 역시 미립자가 읽어내고 반영한다. 그 세계를 공유하는 것이 이 세상인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우리 집 뒷산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더 정확히는 자신이 그렇게 안다고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믿음이 미립자에 실린 결과가 아니냐는 것이다. 미립자는 물리적 실체만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까지도 모두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집단 무의식, 민족 정서, 국민성 등등도 다 같은 원리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나의 의도 단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바꿔버릴 순 없다. 만약 그랬다간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

작은 것에도 몸이 이렇게 기민한 통증 반응을 보내오는 것은 어찌 보면 축복이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이전에 미리 피드백을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이 보내는 소리, 마음이 보내는 소리에 늘 귀를 쫑긋 열고 있어야 한다. 그 소리들은 자신이 그것을 듣겠노라는 결심이 없이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 결심이 강할수록,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수록 미묘한 수준까지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22.05.19 (목)


(..)

검열관은 그저 겁 많은 5세 아이일 뿐이다. 우리 자신을 어떻게든 보호하라는 특명을 받고 그것에 충실한 뿐인 성실한 녀석이며, 그래서 딱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또 순수하다고까지 여겨지는 녀석이다. 구태여 그를 미워하고 억압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그가 안심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경보를 울려대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토닥이며 알려줘야 한다. 그것이 알아차림이 지닌 부드러운 힘이다.




22.05.20 (금)


(..)

아침에 자꾸 더 자고 싶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이 혹시 마음에 여유가 부족해서는 아닐까? 동시에 하는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들어 소홀해진 명상을 다시 강화하는 것이 이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명상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이것저것 하는 것이 늘어나면서부터였다. 시작은 심적 여유의 부족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 시간의 부족이었다. 그러나 명상 시간이 줄어들자 점점 심적 여유까지 줄어들게 되었고, 이는 내 일과 속에서 시간 관리 능력이나 집중력 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 결과적으로 물리적/심리적 여유가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워본다.

(..)

매시간대별로 할 일을 계획하고 트래킹 하는 것의 효과가 좋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나의 경우 그것은 쓸데없는 생각과 고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을 막아준다. 지나친 생각은 행동력을 떨어뜨린다. 

(..)

시간대별로 계획을 세워두는 것은 매 분, 매 초의 미시적인 수준으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겠노라는 강박이 아니다. 그런 계획이 내게 갖는 의미는 바로 맺고 끊는 힘을 기르는 훈련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언제 어떤 일을 하고 언제 끝낼지, 그리고 그다음은 무슨 일을 할지가 명확해진다. 할 일이 적거나 단 하나라면 구태여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싶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겐 이와 같은 능력을 기르는 것은 무척 중요해 보인다.

(..)

나는 삶은 통제할 수 없기에 계획을 짜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만 여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계획 자체에 너무 방점을 찍고 이행 여부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에 있지 계획 그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융통성도 계획이 있어야 부릴 수 있다. 항로가 있는 선박이 항로를 수정할 융통성을 갖출 수 있는 것이지 항로 같은 것도 없이 바다에 둥둥 떠서 표류하는 나룻배에게 융통성이 웬 말인가. 

(..)

지금까지의 나는 삶의 방향성만 있고 계획이 없었다. 방향성 만으로도 사람은 움직일 힘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큰 방향성만 있다면 이따금씩 막연하며 뜬구름 잡는 소리,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완해 주는 것이 계획이다. 방향이 최종 목표라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여로를 짜는 것, 중간 지점과 쉬어갈 지점을 정하는 것이 바로 계획인 것이다. 결국 인생에서 방향과 계획은 모두 필요하며 둘은 상호보완적인 존재다.

(..)

출근은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이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달렸다. 출근이 신나고 설레는 일이 될 순 없을까? 어쩌다 우리는 매일매일을 마치 시지프스가 형벌을 받듯 고통과 인내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나.

(..)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탈출할 수 있는 열린 감옥에 수감되어 있지만, 스스로 걸어나갈 생각을 못 하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그곳이 사실 잠기지 않은 곳이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닐는지.




22.05.20 (금)


(..)

테테의 romantico가 흘러나올 그때, 술기운이 살짝 올라서 였을까, 7주년 기념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문득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이 내 시야에서 살짝 아득하게, 마치 'Lomo 필터 효과'처럼 주변이 흐릿해지며, 이 사람과 여생을 함께 하고 싶단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재잘대고 있는 일상 얘기는 어느새 내 귀에선 잠시 희미해지고, 나는, 아주 잠시였지만 체감상 제법 긴 시간을, 그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은근한 미소를 띠며 그윽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

내가 아직 너무 순진한 것일까. 우리 나이대쯤이면 그런 현실적인 기준이 맞지 않으면 제아무리 오래 만났다 한들 하루라도 빨리 관계를 정리하는 편이 서로에게도 더 좋다는 그런 통념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

지나간 세월을 속절없이 내 곁을 스쳐가버린 야속한 대상이라는 라벨을 붙이고는 하지만, 누군가 함께 인생을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보면 손잡고 같이 지나온 시간들은 켜켜이 쌓여 두 사람의 발밑을 든든히 다져주는 토대요, 둘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주는 수호천사 역할을 해준다. 모든 관계가 무조건 함께 한 시간의 양에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인생이라는 길 위에 찍혀있는 발자국이 나 혼자만의 것 아니라는 것에, 누군가 또 다른 사람의 그것이 언제나, 7년간 한결같이 그 곁을 지켰다는 사실에서 새삼 벅찬 감사를 느낀다.

(..)

결혼을 문화적 의무나 통과의례가 아닌, 관계의 최종 지향점이자 영원한 과정이라는 관점으로 보자면, 우리 커플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그리고 토끼처럼 여기저기 헤집고 경험해 보면서 둘만의 속도로 그 여정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

최소한의 암기를 시키고 그 외엔 자주 듣게 함으로써 익숙해지게 하는 공부법은 참으로 효험이 크다. 악착같이 이것 꼭 외워야 해! 하지 않아도 3D 프린터가 뭔가를 만들어내는 신기한 모습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역학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가 머릿속 한자리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

나는 지금 내 배에 역학이라는 진리의 학문을 잉태했다. 임신한 여인이 심신을 늘 가지런히 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듯, 나 역시 이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잘 자라날 수 있도록 행동을, 생각을, 육신을 올바르게 정렬해야 할 것이다.

(..)

나는 그를 통해 세상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영감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믿음이다. 신용과는 별개로, 진실이나 증거 같은 이성적 근거와는 별개로 진정성에서 묻어나는 끌림, 그리고 무엇보다 늘 뒤따르는 편안한 감정. 이런 것들이 누군가를 무리의 학으로 만든다. 학이 할 것은 그저 학으로 계속해서 남아있는 것이다.





[주간단남]

첫 번째 글(21년 6월) 보러가기



간단남 응원하기

작은 관심과 응원만으로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간단남] 5월 2주 차 아침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