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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y 30. 2022

[주간단남] 5월 4주 차 아침 생각

22.05.22(일) - 22.05.28(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5.23 (월)


(..)

효율성 추구가 극대화되면 반드시 도덕적/윤리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최대한의 논의를 거치고 합의된 기준을 도출한다고 해서 개인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천부적 인권은 우리 기대보다 의외로 굉장히 낮은 수준의 우선순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문서상에만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정의한 자들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고, 그러한 정의로 인해 그것의 존재를 믿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모든 인간은 결국엔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인간의 우열함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모두가 기본적으로 타고난 동일한 '권리' 같은 게 있다고 100%가, 그것도 같은 수준과 동일한 맥락에서 동의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기인한 인지부조화에 대한 자각이다. 행동하는 것과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전제가 되어있다면, 그 과정 속에서 긍정적인 측면에 더 중점을 맞추는 것은 정신 승리가 아니라 효과적인 전략에 가깝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확증편향에 빠져버리거나, 엄연히 존재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외면하고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혹은 행동하지 않는다면, 또한 스스로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때서라야 비로소 정신 승리라고 비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마저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없다면 너무나도 쉽게 인간은 자기혐오와 자기 비하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 중에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자기혐오보다는 정신승리를 권하고 싶다.


(..)

그만큼 어떤 환경에 있든 그 안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무척이나 소중하다. 부정적인 관점이 문제를 발견하고 정의하는 역할을 한다면, 긍정적인 관점은 거기에서 무너지지 않고고 계속해서 움직여 문제를 해결해 내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

1년 365일 내내 루티너리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멀리 내다보는 지혜를 발휘하고자 한다면, 의도적으로 또 전략적으로 쉬어가는 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예상치 못한 어느 시점에 갑자기 펑크나 버리는 타이어처럼 내려앉아 버릴지 모른다. 나는 이미 그것을 수도 없이 경험해 보았다. 


모든 것은 조화롭지 않으면 자연스럽지 못하다. 자연 자체가 조화로써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편안함을 느낀다. 




22.05.24 (화)


(..)

배움에는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존의 습관은 새로운 지식을 바라보는 태도에 덧씌워진 필터나 렌즈와 같은 역할을 하여 있는 그대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순수함을 저해한다.


(..)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책이란 독자로 하여금 일시적인 위로나 재미만을 주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을 넘어서 그가 스스로 일어설 힘을, 마음의 중심을 다잡고 나아가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충분히 시간을 갖고 음미하고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구절들이 있어야 하며, 불편감을 유발하여 심리적 컴포트 존(Comfort Zone)에만 머물러 있던 사람을 밖으로 꺼내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현재 어떤 글을 쓰고 있고, 세상을 향해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나 돌아본다.


공감과 힐링 일색인 사람이고 싶지 않다. 술술 잘 읽히는 글을 최우선시 하며 각종 읽을거리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묻히지 않기 위해 '제발 제 글을 끝까지 다 읽어주세요.'라고 호소하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글은 형식보다는 내용에 있다고 믿는다. 날카로운 메시지는 두터운 겉껍질을 뚫고 나온다. 글을 벼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을 벼리는 것이다.


(..)

독자를 불편하게 하기를 서슴지 말라.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 의도가 더 중요하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말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드러내자. 그게 내가 계속해서 뭔가를 써 내려갈 원동력이 되어줄 테니.




22.05.25 (수)


(..)

마음이 잔잔하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지금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감정은 곧 인생 항로에 있어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

날마다 앉아서 일정 시간 무언가에 정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숭고하며 또 스스로의 운을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는 행위일 것이다.

(..)

사상이라는 토대가 우선적으로 튼튼해야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도 없이 글을 쓰는 방법부터 배운다면 천편일률적인 글이 나올 수밖에 없고, 그런 식의 글쓰기는 그것의 장르와 무관하게 앞으로 인공지능이 더 잘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인공지능에게 자리를 빼앗기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겉으로 드러난 형식 자체는 껍데기임을 아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것을 아는 자는 본질에 충실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방법론, 기술이나 테크닉 등에만 중점을 찍던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끝내 자리를 빼앗기고 마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특정 직업 분야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공지능이 학습할 수 있는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특정 직업은 안전하다 안전하지 않다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관점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본질에 집중하는 것의 중요성은 누군가 쉽게 알려줄 수도, 곧바로 배울 수도 없다. 오직 스스로가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 얻은 양분을 소화시킨 결과로서 얻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앞으로 도래할 인공지능 시대에서 '인간다움'이라는 숨은 진주와도 같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두려움 없이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 그의 영혼은 그 누구보다도 맑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알고 방향성이 뚜렷한 사람일수록 깨끗한 영혼을 지녔다. 그의 모든 숨결 하나하나가 영혼과 그것이 깃든 육신에 양분을 제공한다. AI는 데이터가 없으면 학습이 불가능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영혼과 마주하며 내면으로 침잠하는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을 진보시킬 수 있다. 

앞으로 이에 대해 인지하고 스스로 각성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대규모의 인류가 큰 시련을, 큰 혼란의 시기를 겪으며 기존에 자신을 가두고 있던 알을 깨고 각자 저마다의 세계를 향해 날갯짓을 하는 경험을 할 것이다. 

근거는 없다. 다만 내 내면의 목소리가 예감한 내용을 그저 받아 적었을 따름이다.



22.05.26 (목)


(..)

역학을 안다고 해서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순 없다. 그보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운명의 메시지에 대한 수용이 가능할 뿐이다. 운명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든 것은 개인이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운명에 관해서 만큼은 소극적인 수용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내세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과연 모든 이가 변하게 될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군대 생활이 마치 내세의 존재를 알게 된 인간들의 현생의 모습 같다고 말이다. 지금 현생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요,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그 끝은 오리라는 점을 알고 시작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군 생활이라는 것이, '삶은 곧 고통'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현생을, 그리고 전역이라는 존재가 그런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내세로의 출발을 나타내주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사람들이 내세의 존재를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되었다고 한들, 모든 이가 개과천선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됐다. 이전에는 내세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 모두가 현생을 지금처럼 살아가지는 않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군대로 비유해서 생각해 보니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군대에서 왕이라고 해서 밖에 나가서도 그것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지만, 모두가 군 생활이 마지막인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각성에는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다. 바로 '인과율'에 대한 자각이다. 현생에서의 악행이나 자신의 미션에 대한 수행을 게을리하거나 외면한 것 등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기록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그것이 고스란히 내세의 삶에 반영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결코 현생에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이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 모든 사람은 그런 것에 대한 자각이 전무하거나 알더라도 부정하는 사람이거나 혹자는 악마의 대리인인지도 모르겠다.



22.05.27 (금)


(..)

모든 경험이 일어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만 알아두라. 그리고 그것이 왜 내게 일어나는지는 대개 단번에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도. 대부분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전체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야 파악이 가능해진다. 그러니 의미를 구태여 알아내려 애쓸 필요도 없이 그저 이것도 뭔가 내게 시사하는 바가 있겠거니, 내게 필요한 일이라 일어난 것이겠거니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불필요하게 과장해석하고 피해 망상에 젖을 필요가 없게 되며 사람 탓, 세상 탓 혹은 자기혐오 등에 빠질 필요 역시 없게 된다.

(..)

늘 유쾌하고 평온한 상태에 머물라는 것에 담긴 이치를 어느 정도는 알 것도 같다. 이는 그런 감정을 제외한 나머지는 악하고 쓸모없으며 나에게 해가 되므로 억압하고 눌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평온함에 집착하여 어떻게든 그 상태를 고집하라는 것도 아니다. 감정을 나침반으로 활용하여 자신이 현재 참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매 순간 유심히 관찰하라는 뜻이다. 평온함에 머문다는 것은 그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이자 올바른 상태에 지표일 뿐,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가 되고 집착과 집요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2.05.28 (토)


(..)

때를 기다리며 계속 뒤로 미루기만을 반복한다면 발전이 없다. 뭔가를 해봐야겠다고 느낄 때, 그때가 어쩌면 영혼의 관점에서는 시작하기 가장 좋은 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마트나 백화점에서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안돼!'하며 엄포를 놓는 부모처럼, 내면에서 이는 호기심을 단번에 일축해 버리고 만다.

(..)

자신이 무엇이, 가령 '꼰대'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은 오히려 그럴 공산이 매우 큰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모 아니면 도다. 정말 크게 성공했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것. 대부분은 후자에 해당한다. 자기만의 색채가 진할수록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나를 싫어하고 나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연락이 끊기는 사람이 있어야 한편으로는 나 자신만의 길을 잘 걸어나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마라.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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