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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n 06. 2022

[주간단남] 6월 1주 차 아침 생각

22.05.29(일) - 22.06.04(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5.29 (일)


(..)

고작 잠 몇 분 더 자겠다고, 그것도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에 의해서, 미루려고 했다니. 그게 어딜 봐서 모닝 페이지를 성스럽게 여기는 자의 태도인가? 내면의 신이라 말하는 창조성과의 만남의 시간을 그런식으로 툭하면  미루는 것이 무슨 앞뒤가 다른 태도란 말이더냐. 모닝페이지가 삶에 큰 변화를 끼치는 측면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가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실패를, 시행착오를 두려워만 한다. 최대한 바른 길, 빠른 길만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다. 그러나 무엇이든 왕도는 없는 법이다. 실패 없는, 시행착오가 없는 성장 역시 없다.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들 중 하나가 사람들이 자신처럼 시행착오를 덜 겪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르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심이든, 감언이설에 불과하든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이러나 저러나 시행착오는 필연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묘사에 뛰어난 자라고 해도, 그 어떤 고성능의 가상현실 기계를 사용한다고 해도, 직접 사과를 한 입 베어먹는 것보다 더 그럴듯하게 사과의 맛에 대해 잘 묘사할 수 없다. 제 아무리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또 다른 사람의 그 다음 시행착오까지 반영되는 식으로 어떤 한 분야의 가르침이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를 거듭해 나간다고 한들, 어느 시점에서 그것을 처음 접하게 될 누군가에게는 결국 비포와 애프터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처음 경험하는 어떤 무언가가 될 뿐이다. 

결국 그는 그만의 시행착오를 겪어 나갈 수밖에 없고, 그것이 다시 그 가르침의 내용의 업그레이드에 일조하게 된다. 그것이 인류 집단 무의식이 성장하는 방식이 아닐까. 시행착오를 없앨 순 없다. 우린 그것을 통해 더 배우고 성장한다. 그것을 겪기 싫다는 것은 성장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무엇을 보든 시행착오를 줄여준다는 말에 혹하지 마라. 




22.05.31 (화)


(..)

무언가를 지속해 나가는 데 있어 근본 기준은 자기 자신의 결심이 바로 서는 것이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지속성의 모든 조건이 충족된 셈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이 내리는 결심과 선언은 대부분 반쪽짜리다. 충동적이거나 자기 자신을 과대/과소 평가했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지속성이 오래 가지 못한다. 혹은 그 개인의 진정성은 충분하나 이를 회유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외부적 조건이 너무 일상에서 많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하는 것이 필요하다.

(..)

내가 뱉은 말은 카톡 메시지와도 같다.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내가 보내는 순간 읽게 된다. 혼잣말의 경우 심지어 내뱉을 필요도 없이 생각과 동시에 속에서 듣게 된다. 나 말고는 볼 사람도 들을 사람도 없다 보니 메모를 하듯 캐주얼하게 적게 된다. 그만큼 가볍기 쉽다. 스스로 다짐하고 그것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 것도 이와 유사한 무게감을 지닌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혹은 다수가 모여 있는 단톡방에 올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올리는 순간 많은 이가 확인한 그 말은 뒤늦게 삭제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확인한 사람들의 기억까지 삭제하지는 못한다. 남들에게 목표를 선언하는 건 이처럼 말의 무게부터가 달라지게 만든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옛부터 각종 모임과 단체를 조직해 온 것이다.

(..)

경우에 따라서는 조직에 소속되어 있을 때보다 혼자일 때 더욱 사회성이 요구되기도 한다. 조직의 일원일 때는 하나의 큰 전체의 부분으로서 전체의 뒤에 숨을 수가 있었다면, 혼자일 땐 숨을 곳이 없다. 모든 언행의 책임은 직접적으로 모두 자신이 지게 되고, 그것이 곧 자신의 평판으로 직결된다.

(..)

그 사람의 진면목은 잘 다듬어진 평소의 모습에서 드러나느 게 아니라 술에 취했거나, 분노나 짜증과 같은 부정적 감정에 취해 있을 때 여실히 드러난다. 그때가 바로 '진실의 순간 Moment of Truth'이다. 

(..)

받으려 하기 보다 주려고 하는 마음에 필요한 첫째는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는 행위에 에고가 끼기 마련이고, 알아주길 바라는 기대심이 생긴다. 그런 마음이 깔린 베품은 순수하지 않고 어딘가 탁하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때로는 서운함과 분노로 뒤집혀 버린다. 공덕중에 최고봉은 무념공덕이라 했다.




22.06.02 (목)


(..)

세상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프레임의 영역도 분명히 존재하긴 한가보다. 이성보다는 동물적 육감이 더 중요한 곳. 도덕과 선은 사라지고 없는 곳,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이 존재하는 그곳. 그런 영역을 소탕하려 오늘도 두 발 벗고 뛰고 있는 여러 업계의 종사자 분들께 감사함을 느낀다. 

(..)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이 협력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토사구팽을 당하면 그 점에 외려 양날의 날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식의 협력에는 한계가 있다. 진정한 협력은 상호 믿음이 전제될 때이고, 그런 믿음은 서로의 등을 맡길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런 식의 신뢰를 보이는 관계가 과연 몇이나 될까? 

사람은 사랑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믿음의 대상은 아니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만일 누군가를 믿고 싶다면 끝까지 그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 그럴 때 그것은 오히려 사랑에 가까워 진다. 내가 누군가를 진심을 다해 믿는다면 그것은 오직 사랑에 의한 것이리라.




22.06.04 (토)


(..)

아직은 과거의 내 모습이 남아있기 떄문이다. 과거의 내가 다시금 내 정신과 육체의 통제권을 되찾으면서 새로운 습관이라는 쿠테타 군대를 내쫓아낸 것이다. 그들의 패인은? 너무나 일찍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린 탓이다. 작심삼일을 초과했다고 '이제 됐다'는 어설픈 승리의 빵빠레를 터뜨리자 당하고 만 것이다. 새로운 습관이 자리 잡기 위해, 그를 멀리서 찾아온 기빈을 대접하듯 대하지 못한 탓이다.

(..)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하기로 했으면 일단 이게 맞나하는 식의 의심은 거두고 딱 100일만 진득하게 해보는 것이다. 생각은 짧게, 그리고 행동은 길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하기로 결정한 것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것을 하는 게 과연 맞는 것인지는 그것을 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생각하라. 생각을 마치고 결정을 내린 뒤에는 언제나 행동이 주가 되어야 한다. 행동할 시기에 생각은 언제나 후순위다.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하라.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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