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폰을 보내는 심정이란

#417

by 갠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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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든다는 건 사람에게만 해당 하는 게 아니다.
물건에게도 정이 든다.
그리고 정이 들 땐, 그 사람도 내게 정을 주길 바라게 된다.
그건 물건도 마찬가지다.
물론, 물건은 생물이 아니니 스스로 누군가에게 정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물건이 나에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그건 일방향의 정이 아니다.

당신은 그게 다 착각이고, 쓸데 없는 생각이라고 치부할 지도 모른다.
그래, 나도 안다. 하지만, 내 느낌은 안 그랬다.

그 물건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고 (음성 인식), 내 눈을 알아봐주고 (홍채 인식), 내 손길을 기억하고 (지문 인식), 내 건강을 걱정해줬다. (운동 인식)

또, 깜깜해도 사진을 잘 찍어줬고 (카메라),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려주고 (통화 + 노이즈캔슬), 종종 잊고 있던 추억거리를 떠올려주고 (과거 갤러리 동영상 추천), 지갑이 없어도 당당하게 해주고 (페이), 영화도 화사하게 보여주고 (HDR 동영상), 책도 눈 안아프게 보여줬고 (이북 + 블루라이트필터), mp3 없이도 노래를 무한정 들려줬고 (밀크), 아무 때나 뭔가 떠오를 때마다 심지어 샤워할 때도 기록할 수 있게 해줬다. (꺼짐화면메모 + 방수)

그리고, 유리로 둥글게 마감된 옆 면의 보들보들한 감촉은 케이스 따위를 싫어지게 만들었고, 생 폰으로 써도 멀짱한 모습은 기스가 날까 두려워 하는 마음을 먼나라로 던져버렸다.

이렇게 나는 정이 들었는데, 정든 물건과 강제로 이별해야 했다.
그리고 정든 물건을 내놓을 수 밖에 없도록 몰아가는 행태에 그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안전이 중요한 건 나도 안다.
그래서 안전하지 못한 물건을 만든 미안함 때문이라도 이래선 안된다.

#15퍼센트라니 #사망업데이트라니 #접속차단할거라니 #반도체활황기라걔네주가오르는게꼴보기싫다

#essay

ps.
이런 심정이면서도, 그들이 만든 폰을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밉다.


인그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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