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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Sep 30. 2017

바다, 가을꽃 해국, 바람

# 보고 싶었던 바다와 가을꽃 해국과 느끼고 싶었던 바람을 만나다.

가을바다

그냥 보고 싶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삶에는 이미 익숙했고, 그 삶이 의미 없는 삶도 아니었으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 삶이라도 나는 매일매일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어도 미련은 있을지언정 후회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아쉬움과 미련 같은 것이다.

이젠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하는 것으로 후회하거나 혹은 안달하지도 않는다.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이 순전한 자유 의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냥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제 그렇게 살아가는데 익숙해졌다.


어쩌면 이것이 늙음의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다.

바다


30년 가까이 함께 살아준 아내와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나보다는 더 젊었던 장모님과 장인어른과 유일하게 언제든지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는 애완견 '뽀뽀'와 함께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 앉았다.


창밖을 보니 젊은이들이 연인과 함께 추억을 남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마다 연인들인 것이 신기했고, 그 젊은 시절엔 그렇게 이성에게 끌리기 마련이라는 것도 신기했다.

그것이 삶이려니 싶다.

이제 곧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이성에 끌린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

'늙어서 골골거려도 남자들은 다 똑같이 밝힌다는 말'이 진짜인 줄 알았다가 희망사항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나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희망사항이 현실처럼 말해지고 있는가?


추억을 남기는 젊은 연인들을 보면서 '참 좋을 때다!'하면서도 그다지 부럽지만은 않은 것은 지금 내 삶도 그럭저럭 좋지 않은가 싶은 까닭이다.



나이가 들면서 까탈스러워졌으며,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조금은 무뎌졌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너무 편안해진 까닭이며, 앞으로도 족히 20년은 더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서로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기싸움을 할 때에는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냐?' 싶은 것이리라. 이제 속을 다 보여줘도 그냥저냥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만큼의 시간을 살아왔으니 언제 싸웠느냐는 듯 해해거린다.


해국


그래, 저 해국이 보고 싶었다.

바다도 보고 싶었지만, 파도소리도 듣고 싶었고, 바람도 맞고 싶었지만, 바위틈에 피어난 해국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먼길이라고 툴툴거리면서도 바다로 향한 이유는 바로 이 해국 때문이었다.


피었구나.

그래 고맙다.


그것이 전부였다.

옛날처럼 '갯바위에 피었으며,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난을 친구 삼아.....'이런 수식어는 필요가 없었다.


피었구나.

그래 고맙다.



만나고 싶은 것을 다 만나고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왔다.

하루를 비웠지만, 내 삶의 터전은 그냥 나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착각.


여전히 내가 없어도 세상은 세상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내가 있어도 세상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정의와 불의가 뒤섞여 혼란스러워 못 살 것 같은데도 카오스 속의 코스모스는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런 세상이 고마울 따름이다.

만일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지고 가야 했더라면, 나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삶이 그냥저냥 가벼운 이유는, 책임져야 할 일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소소한 일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또한 소중한 것이고, 의미 있는 일이 리라.



지금의 아내보다 어릴 적 만났던 장모님은 어느새 할머니가 되었고, 아내는 그때의 장모님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젊었던 시절은 가고 이젠 한창 젊기만 했던 우리도 어깨며 무릎이며 서서히 녹슬어감을 체감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늙어갈 수 있다는 것,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선물인가?
게다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니 이것은 너무도 큰 신의 선물이 아닌가?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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