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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Dec 18. 2017

구걸하는 목회를 하지 마라

# 목회자의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개인적으로 목사가 지녀야 할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신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연구하고, 지금 그 말씀이 시대에 어떤 말씀인지를 해석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것의 바탕은 올바른 역사의식과 세계관의 정립이다. 목사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될 부류 중 하나는 역사의식이 부재한 사람이다. 목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내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목회를 전적인 섬김으로 여기는 풍토다. 끝없는 낮아짐, 이것이 자발적이길 바라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것을 목사에게 강요하고, 자발적인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끊임없는 섬김을 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이런 일들은 ‘목회의 권위’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목회자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다양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에 있다고 본다.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일이다.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말씀으로 해석하여 선포하는 일이다. 이런 면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오역하여 본질을 호도하는 목회자들뿐 아니라, 말씀을 수단화한 목사들은 차치하자. 교인들의 수준에 맞춘다는 명목으로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는 목사들, 어떤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지 알지만 당장 밥줄(?) 걱정에 타협하는 설교를 하는 목사들, 이런 것 때문에 목회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이런 식의 설교와 이런 식의 목회 때문에 교인들은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멋대로의 신앙으로 복음의 길과는 동떨어진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소경이 소경의 손을 잡고, 소경이 마치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행세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곳에서 목회자의 권위는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획득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맘몬에 근거한 권위,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설교자는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했는지와 그 말씀대로 자신이 살아가고자 했는지 지대한 관심을 둬야 한다. 그런데 대다수는 이런 과정보다는 교인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로 설교를 판단하고 있으며, 설교자 스스로 교인들의 반응에 너무 민감한 나머지 교인들의 입맛에 맞추는 설교를 한다.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십자가 홍수시대에서 교인은 언제든지 편의점을 선택하듯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교회를 찾아갈 수 있다. 자신들의 입맛을 충족시켜주지 않는 교회는 소비하지 않는다. 이런 악순환과 대형 보수교회와 단체와 권력 지향적인 목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들을 서슴없이 하는 동안 목회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밟히고 조롱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에 목회자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구걸하는 목회’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교인들도 올바른 신앙을 갖고 싶다면 목사로 하여금 구걸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구걸하는 목회가 무엇인가? 단지 경제적인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목회자가 된 이들은 들에 핀 꽃과 공중을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임을 믿는 자들이 아닌가? - 이것은 개인 신앙고백의 차원으로 두어야지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마시라. 최소한의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사례비도 확보되지 않은 목회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적용하는 이는 저주받을 지어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에 나와주십시오!” 같은 종류의 구걸이다. 그것은 개인이 결단할 문제다. 목회자는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고, 예전을 집행하는 일에 치중해야 한다. 이 말씀을 선포했을 때 교인들의 반응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구걸 목회로 발을 딛는 것이다. 물론, 교인들의 수준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혜롭게 하되, 말씀의 빛을 가리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말씀은 선포다. 선포된 말씀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기 위해 힘쓰고,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일뿐이다. 하나님 말씀을 대언할 때 비로소 목회자의 권위는 바로 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에 대언하려면 역사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이것은 저절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개인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 지점, 이것을 게을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제대로 대언되지 않고, 역사의식이 없으니 말씀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역사의식과 삶의 실천이 결여된 설교는 강요될 수밖에 없는데 결국, “믿습니까?”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믿습니까? 아멘!”이 많은 설교가 공허한 것이다. 들을 때는 기쁨 충만했지만, 현실의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신앙 따로 삶 따로, 결국 선데이 크리스천을 양산해 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선데이 크리스천의 신앙 인식이라는 것은 미천해서, 자기들 입맛에 맞아야만, 사탕을 물려주어야만 “아멘!” 하는데, 거기에 맞춰주는 목회를 하는 것이 제대로 목회하는 것인 양 왜곡된 바가 있다. 이것 역시도 구걸하는 목회의 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권위 있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면, 말씀에 집중하라. 말씀에 집중하되 우리의 역사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라. 교인들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바로 구분하여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조언하라. 단순히 교인의 귀를 만족하게 하는 설교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목회는 어려운 길이 아닌가? 우리네 역사도 삶도 상실한 설교가 난무하는 한국교회, 여기서부터 신앙의 타락은 시작되었다. 오죽하면, 세월호의 ‘세’ 자도 꺼내면 불편해하는 교회가 되었는가? 피에타, 아들의 시신을 부여잡고 슬퍼하는 마리아, 그런데 자식의 시신조차도 찾지 못해 피에타보다도 더 큰 슬픔을 품은 그들에게 돌을 던지도록 방치하는 것도 모자라 돌을 던지는 교회는 도대체 교회일 수가 있는가? 그런 악령에 사로잡힌 교인들을 치유할 생각도 없이 은혜로운 설교? 이런 류의 목회가 구걸하는 목회이며, 결국 이런 이들 때문에 목회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목회가 서빙이라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칼 들고 무당춤 추는 아이들에게 잘한다, 잘한다 하며 “작두 위에 올라가 보라!”라고 독려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기 위해서 힘쓰는 것, 그것 외에는 목회자의 권위를 세우는 방법은 없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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