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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Feb 17. 2018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

#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생명의 땅과 죽음의 땅을 잇는 유일한 다리는 사랑이다.”
-손턴 나이번 와일더


■ 왜곡된 사랑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 파괴되고 왜곡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파괴된 사랑 때문에 생명의 땅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한 땅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사랑이다. 저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까닭에 사랑에 대한 왜곡현상이 나타나고, 사랑이라며 학대하는 일도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 예를 들면, 사교육 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은 꿈을 저당 잡히고 살아간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명목으로 자녀는 물론 자신들의 삶까지도 저당 잡히며 살아간다. 학원과 학교만 오가며 어려서부터 경쟁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자신의 꿈이 아닌 부모의 꿈을 대리로 이뤄주는 존재가 되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사교육의 문제뿐 아니라 이 시대의 사랑은 ‘섹스문화’에 중독이 되어있다. 페미니즘에 관한 근거 없는 반발이나 반대는 물론이고, 성 소수자들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 역시도 육체적인 쾌락을 위한 섹스문화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왜곡된 성 의식은 오로지 이성을 성 도구로만 바라보게 함으로써 ‘에로스의 종말’(한병철)을 가져온 것이다. 


이런 사랑에 대한 왜곡현상은 다양한 방면에서 아주 지적인 방식(결국은 저열한 방식이지만)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여성과 남성에 대한 평등과 동등함을 강조하는 교회에서조차도 교회 중심에 여성이 서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여성 자신도 절반의 사람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남성 중심의 교회를 당연시한다. 마초 문화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남성에게 ‘나쁜 남자’가 되라고 강요하고, 심지어는 여성조차도 ‘나쁜 남자가 좋다!’는 그릇된 가치관을 내재화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히기도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남자다움’이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남성과 여성 모두 해방되지 못한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 시각화된 사랑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들었으며, 시각화한 것이다. 성적인 것은 포로노화되었고, 상품화되었으며, 여기에 걸맞은 상품으로 포장되는 성형의 과정을 거쳐 ‘동일한 미’를 창출해내고 있다. 다양성은 사라지고 동일성의 지옥에서 살아가는 시대가 된 것(한병철 – 에로스의 종말)이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3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신을 형상화하고 시각화하는 장면이 묘사되어있다. 구약의 신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신’이었으며, 신의 얼굴(형상)을 본 자는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고대 근동 지방의 신들은 대부분 형상이 있었다. 광야를 떠돌던 유목민에게 정착해서 살아가던 이들에게 ‘보이는 신’은 매력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신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것이 황금 송아지를 만든 근본적인 이유다. 그들은 이렇게 신을 시각화함으로써 신을 상품화했고, 포로노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황금 송아지는 우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의 조형물 ‘매끄러운 풍선 개’와 알베르트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걷는 사람’ 사이에 서 있다. 둘 다 ‘시각화’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매끄러움으로 상징되는 ‘풍선 개’와 부피감을 상실한 작은 막대기처럼 골격만 앙상함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시각화를 통해서 타자를 인식하는 인간의 한계를 신자유주의는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매끄러운 ‘풍선 개’도, ‘걷는 사람’도 경매 사상 최고가를 갱신하며 가격이 곧 작품의 가치가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자유주의는 예술작품뿐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인 인간까지도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최상의 상품이 되는 가장 쉬운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각화와 관련이 있으며, 성형 혹은 동일성의 지옥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 사랑이란?

사랑은 자신을 도와주거나 헌신할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면 자신의 삶을 보완해줄 보조품을 찾는 것이지, 사랑할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아니며, 누구에게 헌신을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서로 헌신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헌신하려면,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가능성을 열어주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이런 관계로 발전하려면, 상대방의 사소한 말이라도 경청하고, 서로의 삶을 응원해주고,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희생되는 방식의 사랑, 그것은 사랑의 가면을 쓴 학대일 뿐이다.


사랑이란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다. 이 경험을 통해서 자아의 실존을 깊이 있게 인식하게 되고, 이 타자의 경험은 절대 타자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지점에서 타자를 발견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요구한 것-“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이다.


이런 시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모본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사랑을 위시해서 여전히 이 시대에도 사랑이란 이름에 무색하지 않은 빛나는 사랑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이 시대의 희망이다. 여전히 빛나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 내면을 가꾸라


이런 시대에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면’을 깊게 하는 일이다. 내면을 깊게 하는 일은 더딘 작업이다. ‘빨리빨리(speed life)’가 미덕인 시대에서 ‘느릿느릿(slow life)’을 추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기꺼이 ‘천천히 느릿느릿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일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성서의 모든 진리의 말씀을 이 시대에서 삶으로 살아가려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세상 풍조와는 전혀 다른 삶의 가치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풍요로움과 성서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한 마리의 토끼가 아니라 두 마리의 토끼다. 그런 점에서 성서는 늘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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