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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ul 29. 2018

성경은 미래에 관한 책이 아니다

# 성경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어느 종교나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념을 체계화한 경전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역시도 ‘경전’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성경(성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경전으로 받아들여진 66권의 성경에는 유대 묵시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계시록’이 있는데, 구약성경의 다니엘서는 물론이고 예언서들과 신약성경의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계시록’이 대표적이다. 


‘묵시’의 특징은 상징과 비유의 언어와 환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시’를 ‘문자’로 읽으면 본래의 뜻을 상실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제구실을 못하고 손가락질당하는 이면에는 성경을 문자로 읽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성경은 미래에 관한 책’으로 오해하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을 ‘죽어서 천국에나 가는 이상한 종교’로 만들어버렸다. 모든 종교는 ‘내세관’이 있으므로, 육신의 삶 너머의 초월적인 차원에 대한 소망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희생하는 결과로 작용한다면 그 순간부터 종교를 빙자한 사이비 혹은 유사종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번 주제는 성경에서 ‘미래에 관한 책’으로 오해받고 있는 요한계시록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관한 책이 아니라 현재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책이다.

 여러 논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저작 연대는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년)가 통치했던 마지막 시기인 90-96년 경(요한계시록 2:13, 6:9-10, 20:4)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도미티아누스는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했고, 그 시기에는 황제 숭배가 고조되었고,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고 처형했다. 


이런 시대에 로마 제국에 항거하다 박해를 당하고 순교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로마 제국에 의해 먼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가 지금 여기에 오시어 도와주실 것이며, 반드시 로마 제국을 끝장낼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요한계시록은 기록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으므로, 수많은 상징적인 언어들로 로마 제국을 표현하며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적인 언어들도 그들은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우리가 1980년대 ‘대머리, 주걱턱’이라고 하면 누구를 말하는지 분명했던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 대한민국 1980년대에 운동권 사료를 정리하다 ‘대머리와 주걱턱’을 처단하자는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1980년대 대한민국 운동권은 대머리와 주걱턱이라는 외형적인 모습에 대해 투쟁했다고 정리한다면, 그 ‘누군가’는 얼빠진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얼빠진 주장을 신봉하는 이들이 있다면 ‘청맹과니 맹신도’에 해당하겠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읽고 이렇게 얼빠진 해석을 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그 얼빠진 해석에 환호하며 자신의 가족도 버리고, 온 재산을 다 바쳐 헌신하는 이들이 있는 현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는 1992년 10월 28일 ‘휴거 소동’을 겪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도 이런 유사한 이들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도 남태평양 피지가 지상 최후의 낙원이 될 것이라며 400여 명이 이주했다는 황당한 일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무엇에 홀린 것일까? 결국, 미래에 대한 불안감, 지구 최후의 날, 아마겟돈 뭐 이런 것들을 상상하면서 그런 심판적인 상황에서도 자신들은 안전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지금 여기’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결론만 말하자면, 얼빠진 짓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숫자와 환상의 짐승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의 개념도 아니고, 그런 짐승이 실재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오로지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압제 하에서 고난 겪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목숨을 내놓고 저항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는 너무도 분명해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요한계시록’을 금서로 지정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저항의 책’이며, 심지어는 죽은 자들과 연대하여 지금 여기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것을 격려하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짐승 중에는 로마제국을 상징하고,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강대국을 가리키는 것도 있지만, ‘사자’는 예수를 상징한다.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를 생각해 보라.- 붉은 용이나 각종 색깔의 말들과 음녀와 십사만 사천 등등이 의미하는 바는 그 당시 수신인들에게 이해하기 난해한 것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전방위적이고 다양한 식민지 정책을 의미한다. 로마는 이전에 제국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식민지를 지배함으로써 식민지 백성이 로마 제국에 편입되기를 강력하게 원하는 방식을 썼다. 당연히 식민지 백성은 로마인이 되고 싶어 했으며,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것은 그들의 로망이었다. 


다양한 로마의 정책들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도 흔들렸고, 적당하게 현실과 타협하면서 사는 것을 처세술로 여기는 이들이 생겼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에 대해 경고하며 끝까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라고 격려하는 책이 요한계시록이었던 것이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할 때에는 하늘에 계신 예수도 지금 여기에 임재하여 도와주시리라는 것이며,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확증하는 책이므로, 미래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지극히 현재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 요한계시록이다.


미래에 관한 책으로 알려진 요한계시록조차도 현재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라면, 다른 65권의 책들을 어떨까? 그 역시도 그렇다. 성경은 미래에 관한 책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를 묻는 책이다. 결국, 신앙도 과거나 미래의 신앙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라는 현재형이다. 현재 어떤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과거도 미래도 달라지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신비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자꾸만 죽어서 천국 가는 이야기만 한다.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런 이들에게 천국은 없다. 신자유주의라는 맘몬(우상)이 주는 혜택도 다 누리고, 죽어서도 그 혜택을 다 누리고 싶은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는 사이비는 아주 거룩한 언어로, 거룩한 목소리로 죽어서 가는 천국 소망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허접스러운 교주에게 맹신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신앙인이라고 맹신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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