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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an 27. 2018

아주 오랜 일기장을 보다

# 16년 전의 일기 속에 있는 나를 보다

 

일상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할수록 아날로그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진다.

디지털 시대로부터의 유목민이 된다는 것,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요구하는 가상현실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딥펜, 만년필, 붓, 필름 카메라. 

이런 것들은 디지털 시대에 대항하는 나의 무기고, 공통적으로 이것들은 흔적을 남기곤 했는데 아날로그 저장 방식이라는 것은 망각을 전제로 하기에 종종 잊힌다.


2018. 1. 26(금).


노트가 필요했다.

딥펜으로 써도 번지지 않는 양질의 노트가 필요했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모 잉크 회사에서 한정판 잉크를 판매했는데 마침 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서가 책꽂이 한편에 꽂혀있는 노트를 선택했다.


첫 장은 2002년 2월 27일 시작되었고, 한 동안 기록이 없다가 7월 경에 나뭇가지에 대한 단상이 적혀있었다. 


나뭇가지는
아무것도 쥐려 하지 않는다.
오직
공기와 하늘을 호흡하고 있을 뿐.
하늘을 나는 새는
무거운 몸으로는 날 수 없다.
하늘을 나는 새는 나무 소리도 흔적도 없다.


그리고 또 멈추었다.

그러다 2002년 9월, 태풍 루사가 전국을 강타했을 때 일기의 양이 급격하게 많아졌다. 


2002. 9.17(화/새벽)


태풍 루사가 착륙했다.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틈이란 틈은 모두 헤집고 다니며 아귀가 맞지 않는 곳마다 무너뜨릴 듯 흔들어버린다.... 밤새 바람에 하나 둘 찢기어 나가고 지난봄부터 실하게 키웠던 나무들은 나뭇잎을 모두 잃어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저 자연은 온몸으로 바람과 싸우고 있을 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숨어있을 뿐이었다.

곧 무너져 버릴 콘크리트 상자 속에.


2002. 9.18(수)


흙을 만진다.

간밤에 내린 폭우에 멍들어 버린 갓 나온 새싹들을 일으켜 세운다.

오금이 저려온다.

손톱 사이에 낀 흙 때는 비누칠에도 지지 않는다.

살과 뼈 사이에 꿋꿋하게 끼어있다.

못생긴 손, 그러나 부끄럽지 않다.


그리고 태풍이 지난 후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또 일기를 썼다.


웬만한 바람에는 끄떡없다던 제주의 돌담들이 여기저기 무너져 내렸고, 전선은 풀린 실타래처럼 늘어졌다.

가건물과 조립식 건물은 태풍의 표적이었다.


홀로 사시는 80이 넘으신 김 권사님 댁으로 향했다.
파란 지붕이 날아가고, 앙상한 뼈대만 전깃줄을 휘감고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권사님은 비가 줄줄 새는 집에서 구부정한 몸으로 덜덜 떨면서 물을 퍼내고 있다.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저렇게 보냈구나 생각하니, 집안에서 태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던 나는 비겁자가 되었다.....(중략)

"이젠, 다 포기하고 죽을 날 기다릴랍니다. 이 집 하나 지키려고 했는데 이젠 다 끝났수다.!"

그리고 다음날 어수선한 가운데 주일을 맞이했다.
헌금 시간, 헌금 중에는 김 권사님의 감사헌금과 십일조 헌금이 들어있었다.
화가 났다.
나는 이렇게 김 권님에게 빚을 졌다. 그 헌금을 사례비로 받는 목사니....


그렇게 일기장은 2년여 침묵을 지키다가 2004년에 다시 시작된다. 

그렇게 두어 페이지 이어지다가 다시 2008년, 4년 만에 다시 일기가 시작된다(돌아보니 일기가 없는 시간은 주로 디지털로 사는 이야기들을 여기저기 쓰던 시기였다.).


다시 2010년으로 껑충 뛰고, 그 사이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었다.

제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모 기관에서 제직하다 사임하고 3개월여 쉬는 중 아버님이 큰 수술을 하신다. 불효자식에게 아버지께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는 내용들이다. 이후, 아버님은 2017년 5월에 소천하셨고, 어머니는 그보다 이른 2015년 1월에 소천하셨다.


다시 멈추었다 시작된 일기장엔 5년 간의 삶이 한 페이지에 정리되어있었다. 



2015.6.9(화)


2010년 4월 3일, 아버님이 응급실에 가셨을 때 썼던 글이 마지막 일기였으니 5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그리고 예상과는 다르게 어머니가 먼저 1월 15일 이 땅의 소풍을 마치시고 돌아가셨다. 

실업자로서 거반 일 년의 시간이 되어간다.

지난 연말까지는 다리 다친 일로 어영부영 지냈고, 이제 본격적인 작업을 할 시간이 왔는데 몸이 많이 불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어제의 일기다.

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이만 먹는다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나이 40이었던 그 시절, 나의 영혼은 얼마나 맑았는지.... 그 맑은 영혼에 낀 때를 씻어버리지 않으면 나는 그저 크로노스의 시간에 치여가는 퇴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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