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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un 25. 2019

시편 묵상 - 시편 3편

어머니 같은 하나님


시편 사색 - 侍主無恐

저들이 떠들어 대길 “하느님이 저자를 돕지 않으시니 그 목숨 따위 무슨 대수랴?”

그러나 야훼 나의 방패 되셔서 지켜주시고 나의 영광되셔서 제 머리를 들게 하십니다.


개역성경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 이시오, 나의 머리를 두는 자니이다.


메시지

“하! 하나님이 저 자를 도와주신다고!” “Hah! No help for him from God!”

그러나 하나님, 주님의 나의 사방에 방패를 두르시고, 네 발을 받쳐 주시고, 내 머리를 들어주십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외치면, 그 거룩한 산에서 천둥소리로 응답해주십니다.


오경웅은 시편 3편의 제목을 ‘侍主無恐’이라 붙였다.

‘주님을 믿으니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侍’는 어머니에 대한 믿음의 뜻이 있다고 역자 송대선은 밝힌다. 불쌍한 인생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侍’를 사용하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음’, 그 외에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죽음’이라는 것이 있음만 알뿐 그 시기가 언제인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확실한 죽음, 그것은 우리 삶의 의미를 풍성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다. 그것은 곧 생명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생명의 풍성함과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죽음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 3부 10장에는 왼쪽 눈썹 바로 위 이마에 둥근 빨간 점이 박혀 태어나는 '스트럴드블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이 아이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표지인데, 그 나라에는 1,100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3년 전에 태어난 어린 여자아이가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걸리버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면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온갖 즐거운 상상을 한다. 그러나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다. 

30세까지는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가지만, 40세 이후부터는 우울 증상이 생기기 시작하고, 80세가 되면 기억력을 잃을 뿐 아니라, 국가에서는 법적으로 죽은 자로 분류되어 자손들에게 모든 재산이 상속된다. 그래서 겨우 생계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수당으로 받으며 몹시 가난하게 살아간다. 90세가 되면 치아와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미각도 사라져서 밥을 먹는 즐거움이나 식욕이 없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는다. 게다가 이 나라의 언어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200년이 지나면, 일상적인 말 몇 마디 밖에는 나누지 못한다. 그래서 불멸의 존재로 태어나는 이들은 모든 사람에게 멸시와 미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확실성’은 일종의 두려움 혹은 공포심을 유발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 역시도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게다가 불의한 자들이 승승장구하고 하나님이 침묵하는 듯한 시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신다고? “조롱한다. 


시편 3편의 시인이 위대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과 공포 속으로 젖어 들어 가지 않는다. 오히려 불의한 자들의 조롱이 넘쳐날수록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또 원수들이 조롱한다. 그건 방법이 아니며, 그분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런 조롱에도 시인은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외친다, 당신만이 나의 방패, 영광, 머리 둘 곳이라고, 자식을 품어주시는 어머니, 어머니 품에 안겨 위로를 받는 자녀, 그리하여 ‘侍主無恐’이다.


두려움과 경외는 다르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두려움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두려움의 세상이 아니라 신비로운 세상이다. 경외심을 가질지언정 두려움과 공포는 아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아버지도 보고 싶다.

두 분 다 보고 싶지만, 두 분 중 한 분만 만날 수 있다면 아버님을 만나야 할 것 같다.

어머니는 나를 품어주실 만큼 강인하시지만, 아버지는 곁에서 도와드려야 할 것이 있을 것 같아서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 주시기만 했다. 그게 하나님 사랑이니, 侍主無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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