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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ul 04. 2019

시편묵상 14편

시편 14편 –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을 안다면


시편사색 

악행을 행하는 이에게 눈곱만큼이라도 주를 아는 지식이 있기나 할까?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면서도 뻔뻔스레 야훼 주님 모르쇠 하네(4)

허나 주님 덕 있는 자의 이웃되시니 악인 벌벌 떨며 두려워할 것이라(5)


개역성경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

     

메시지

비루하고 거만한 인간들,

“하나님은 없다”고 허튼소리 하는구나.

다들 쓸모없는 자, 어중이떠중이들뿐,

돌아가며 양의 탈을 쓰고 목자 행세나 하나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제멋대로 가는구나(3).

GOD makes their dreams come true(6).


만유의 主宰(주재)이신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다스리는 분이 없다고 우긴다. 

그러니 그들의 삶에 질서가 있을 수가 없고, 그들이 지도자가 되어 다스리는 세상 또한 혼탁하고 더러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조차도 시시때때로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 없으며,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주재(다스리시는 분)되심을 알게 하셨다. 


<시편사색>에서는 악행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을 하는 지식이 눈곱만큼도 없다’고 한다.

 ‘악’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어떤 ‘악행’뿐 아니라, 만유의 주재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오해하는 것도 ‘악’이다. 어쩌면 이것은 더욱 심각한 ‘악행’이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조차도 박탈당한다. 더 불쌍하다.


<개역성경> 6절에 악한 자들과 대비하여 ‘가난한 자’를 등장시키고, 하나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라고 한다. 산상수훈에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복을 주신다고 밝히고 있다.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인가? 후대에 ‘마음이’라는 말이 첨부되었으니,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배제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편에서의 가난한 자는 ‘악한 것으로부터 가난한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밝힌 바대로 ‘악한 것’은 하나님을 ‘눈곱만큼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으로부터 가난한 자’라는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가진 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서 당신을 드러내고 계신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라. 


오늘날, 하나님을 안다는 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되고 있다. 

<메시지>는 그런 이들을 어중이떠중이, 양의 탈을 쓰고 목자 행세를 하는 자라고 번역하였다. 목자 행세를 하는 어중이떠중이들, 그들이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을 알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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