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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ul 05. 2019

시편 묵상 15편

시편 15편 –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갈 수 있을까?

시편사색 

오직 선에 힘쓰며 마음과 입술에 거짓이 없는 이

혀로는 남을 헐뜯지 않으며 마음으로 악을 품지 않으며 사람을 대함에 신실하며

후덕하며 자기를 절제하고 이웃에게 넉넉하여(2~3)


개역성경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4)

     

메시지

“똑바로 걷고

바르게 행동하여

진실을 말하여라(2)“

Walk straight, act right, tell the truth.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주의 장막’에 거할 수 있는 자, 흔한 말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자, ‘하나님 나라’에 설 수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그런 사람들의 덕성은 다분히 윤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신실하고 관대하고 청렴하며 깨끗한 사람,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웃을 탓하지 않고, 비열한 자들을 경멸하는 사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삶을 <시편사색>에서는 ‘克己(극기)’, 자신을 잘 다스려 바른 禮(예)로 돌아간 사람이라고 한다.

 <메시지>는 ‘주님 눈 안에서 사는 자(주님 눈 밖에 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표현하고, <개역성경>은 ‘정직, 공의, 진실’을 제시하면서 혀를 제어하고, 이웃을 비방하지 말고, 허튼짓하는 자를 경멸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라고 한다. 그리고 한 번 약속한 것은 손해를 볼지라도 꼭 지키고, 이자나 뇌물을 받지 말며 무고하지 말하고 조언한다.


다분히 윤리적인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오해하면 ‘윤리적인 삶(율법)’을 잘 살아가면 ‘주의 장막(천국,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그렇지, 시편의 시인이 제시한 바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시인이 제시하는 삶은 
비우고 또 비우고, 훈련하고 또 훈련해도 
결코 온전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시편사색>에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또 비워 無(무)가 되면, ‘낙타와 같은 자아가 사라져 바늘구멍은 차라리 광활한 하늘이 되리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해석한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19장 24절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정말, 가능한 일일까?


시편 15편에서 제시한 덕목 모두를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미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지킬 수 없는 것들도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100%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은혜’와 ‘칭의’의 개념은 지옥의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게 하는 소망의 메시지가 된다.


그렇다면, 이룰 수 없으니 아예 시도하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 미칠 수 없으니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그 어느 순간 자신 안에 그런 덕목이 충만해지면 자연스럽게 삶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희망일지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예의를 상실한 막돼먹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그들은 아예 ‘은혜로만!’을 외치며,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의 인간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철면피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볼 일이다. 끊임없는 克己(극기)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無(무)가 된다면, 바늘 귀가 뭐 그리 좁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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