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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ul 06. 2019

시편 묵상 16편

시편 16편 – 그분의 뜰을 거닐며 경계를 넘어서다


시편사색 

이 땅에 거하는 거룩한 이들 제가 사랑하는 이들이오니

주님의 가르침에 함께 젖으니 그 즐거움 얼마나 풍성한지요!(3)

은혜의 주님 마음에 담고 눈앞에 계신 듯 주님과 함께하네

주님 제 우편에서 붙잡아주시니 제가 어찌 다른 마음 품겠습니까?(8)


개역성경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

     

메시지

하나님, 나는 처음부터 주님만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주께서 나를 택하신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내 손 잡으신 그날 이후로,

나, 바른 길에 서있습니다(11).

Ever since you took my hand, I’m on the right way.


<시편사색>은 이 시를 ‘하나님과 오롯한 사귐의 경계를 노래한 시’라고 해석한다. 


여기에서의 ‘경계’란 구분 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경계로 발돋움했다는 의미다. 

성서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이며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 차원 높은 경계로 들어간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가?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의 뜻에 합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경계를 넘어선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늘 겸손하게 그분의 뜻을 헤아리게 된다. 오경웅은 ‘겸손히 헤아려 본다’는 것을 ‘俯仰(부앙)’으로 해석했다. ‘엎드려 우러른다’는 뜻이다. 이것이 신앙인의 참 자세다.


오늘날, 소위 구원의 확신이 분명한 신앙인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겸손’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교만’의 그림자만 어른거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확신’은 삶 없는 최면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신앙의 성숙은 연수와 직분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중요한 것이긴 하겠지만, 이미 연수와 직분을 자랑한다면 그것 자체가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행동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미 경계를 넘어간 사람은 이웃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늘 엎드려 자신을 살피기 때문(俯仰)이다.

이런 경계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던 것일까? 

<시편사색>에서는 오경웅이 ‘주님의 뜰 안을 거닐며 주님의 뜻에 맛 들이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풀이한다. 

하나님과의 오롯한 사귐은 그의 뜰에서 이뤄졌으며, 손을 잡아 그 뜰에 초대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메시지>에서는 이 부분을 자신이 하나님을 택한 줄 알았는데, 깨닫고 나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한 것을 깨닫는 과정으로 표현한다. 시인은 비로소 안 것이다. 


자신이 결단해서 하나님 뜻대로 사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그의 뜰로 초청해 주셨고, 그분이 자신을 바른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비로소 알았다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가 보니, 새사람이 되고 보니, 거듭나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기쁨은 너무 크다.

그리하여 기쁠 때나 힘들 때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뜰’은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은 ‘그분의 뜰을 가꾸는가, 아니면 파괴하는가?’
당신을 소중히 여기고, 당신 안에 있는 잡초를 뽑아내라.
그분의 뜰을 멋지게 가꾸라. 거기서 새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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