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일상의 사전적인 뜻은 '날마다 순환 반복되는 평상시의 생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단 한 번도 똑같은 날을 살아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평온이 깨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아무 일도 없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아무 일도 없음'이 '아무 일도 없음이 아님'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일상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예술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실, 누구나 예술가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자연이야말로 위대한 예술가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그 자체로 예술기다.
사실, 삶이란 예술의 범주를 넘어서는 신비다.
그래서 삶의 흔적이 있는 풍경은 예술작품처럼 다가와 수많은 울림을 준다.
모두가 다 떠나버린 재개발지구의 골목에 피어난 꽃, 그는 그곳을 캔버스로 삼았고 여느 곳에 피어난 것들과 다르지 않게 피어났다. 척박한 곳에 피어났기에 더욱 신비롭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면서 수많은 상상을 한다.
나는 삶이 만든 예술작품을 보면서 수많은 상상을 한다.
무명 씨가 일상에서 예술임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왜 예술작품이 아닌가?
정오가 살짝 지났음은 그림자가 말해준다.
베니다판에 칠해진 색 바랜 페인트와 그를 고정시킨 녹슨 못과 연탄에서 묻어났음직한 검은색 자국들은 그들의 삶의 고단함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꽃무늬 옷은 벽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시장에서 흔히 만나는 중년들이 좋아하는 무늬다.
빨래 위로 채양의 무늬가 실루엣으로 자리하고 있어 빛이 그리 많지 않은 골목길임을 연상하게 한다.
약간은 색 바랜 옷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개인적으로 몬드리안의 작품과 견주어 손상이 없지 않다고 본다.
몬드리안의 작품이 캔버스에 그려진 것이라면, 이 골목길 담벼락 그림은 삶이라는 캔버스에 그려진 것이다.
색 바랜 방충망은 찢어져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슬레이트 지붕과 벽 사이의 박스와 방충망을 고정시킨 장판과 못은 페인트로 그려진 노랑과 빨강의 축소판이다. 더군다나 슬레이트 지붕은 거뭇거뭇하여 스스로 오랜 세월을 버텨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평생 흙을 만지며 흙과 더불어 살아왔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고단한 노년의 삶이 기거하는 집일 것이다.
이것은 나의 상상이다.
환삼덩굴과 강아지풀이 폐공장 담벼락에 기대어 자라나고 있다.
생명과 버려져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사람은 살지 않고, 사람의 흔적만 남은 풍경은 쓸쓸하고 적막하고 괴기하다.
프레임 속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있고, 그것들은 이제 자기의 역할을 다했음을 자신의 역할을 할 때와는 자뭇 다른 모습으로 서 있음으로 증명한다.
일상의 예술에는 어김없이 삶이 들어있다.
예술가가 만든 작품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예술작품이다.
단지 그것을 만든 작가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한 개인의 삶도 예술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흘낏 보고 지나치거나 혹은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천천히 적당한 거리에서 오랫동안 예술작품에 담긴 혼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 작품에 대한 예의다. 그리고 누구든 예술작품이 깊이를 다 알 수 없다. 설령 작품을 만든 작가도 미쳐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예술은 일상 속에 있다.
미술관에만 전시장에만 예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예술이 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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