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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an 06. 2016

한 겨울에 피어나는 수선화

#20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수선화



해마다 12월 1일이면, 그 꽃이 피어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12월의 첫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막 피어난 그 꽃을 뜰에서 맞이할 수 있었다.

간혹 늦어질 때도 있었지만 고작 사나흘 정도였다.




온실에서 피어나는 꽃 이야기가 아니라 한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 들판에서 피어나는 꽃 이야기다.

겨울에 피어나는 꽃 하면 동백 정도를 떠올리지만, 동백 말고도 남도지방에도 바보꽃이 아닌 제철을 맞아 피어나는 꽃들이 또 있다. 수선화를 위시하여 비파나무, 사스레피나무도 겨울에 꽃을 피운다.


갓 피어난 수선화가 아침햇살에 빛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뜰에 나서면 바람이 잔잔한 날에는 수선화 향이 뜰에 가득하게 앉아있다.

그 향기를 맡으면 마치 달콤한 초콜릿을 입안에 가득 머금은 듯하고, 꿀꽃을 따서 입에 문듯하다.

귤꽃이나 돈나무 꽃이 피어나는 계절에 꽃향기가 진동하는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한 겨울에 이토록 진한 꽃향기를 경험하는 것은 일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신비스러운 일이다.


수선화를 금잔옥대라고도 부른다. 마치 노란 금잔을 하나 품은 것 같지 않은가?


수선화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서 대표적인 이야기는 'Narcissus'라는 속명이 말해주듯이 '나르시시즘'과 관련이 있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 자아도취라는 의미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한 겨울에 피어난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이토록 아름다우니 어찌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꽃잎은 또 얼마나 연약한가?

폭설을 맞은 수선화


그러나 그는 결코 연약하지 않다.

한 겨울 폭설이 내리면 얼른 줄기를 구부려서 고개를 숙여 노란 금잔 속에 들어있는 꽃술을 지킨다.

그리고 이내 눈이 그치고 햇살이 비치면 다시 일어선다.

그렇게 봄이 오기까지 혹한의 추위와 싸우며 피고 지다 봄이면 자취를 감춰버린다.

긴 휴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겨우내 고생이 심했던 만큼 긴 휴식의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겨울비에 맺힌 비이슬에 피어난 수선화


겨울엔 눈만 오는 것이 아니라 비도 내린다.

어쩌면 겨울비가 그들에게는 더 큰 시련이자 유혹일 수도 있다.

목마름을 한껏 해결하려고 했다가는 남아있는 동장군이 몰려오면 얼어 터질 수 있다.

물에 젖은 채로 얼어버리면 젖지 않은 상태에서 어는 것보다 오히려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은 '지금 여기'만 존재하는 것처럼 피어난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만난 수선화


서울이나 중부지방이나 북유럽의 수선화는 대체로 봄에 피어난다.

그럼에도 남도라지만, 제주도에서는 12월이면 수선화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만큼 봄이 빠른 것일까?


그 어느 계절에 피어난들 예쁘지 않은 꽃이 있을까?

그러나 한 겨울, 꽃이 흔하지 않은 시절에, 혹한의 추위와 싸우며 피어나는 꽃은 나에게 많은 힘을 준다.


들판의 꽃도 저렇게 치열하게 피어나는 데
나는 왜 내 삶을 그토록 치열하게 피어내지 못하는가에 대한 반성이다.


수선화-덴마크 / 종과 지역에 따라 모양새는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꽃이다.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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