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누구나 행복한 삶을 바란다.
그러나 이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고, 때론 편파적이기도 하다.
행복의 비결을 아는 이들은 그 행복으로 인해 더 풍성해지고, 모르는 이들은 있는 행복마저도 빼앗긴다.
꽃이 진 후부터 꽃망울을 달고 추운 겨울을 보낸 후 애써 꽃을 피운 목련은 사흘을 가지 못하고 떨어진다.
게다가 떨어지면 그 순백의 하얀 색도 누렇게 변한다.
봄햇살에 까맣게 그을려버린 목련의 꽃잎이 슬픈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성한 나뭇잎으로 인해 숲의 낮은 곳엔 햇살이 여간해서는 내려오기 힘든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래도 빈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간간이 햇살이 숲을 파고들었고, 몇몇 나뭇가지들은 그 빛으로 빛났다.
한 줄기 빛은 낮은 숲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더 찬란하게 빛났다.
빛을 볼 것인지 어둠을 볼 것인지도 역시 주관적이며 편파적이다.
어둠 속에서 빛은 더욱더 찬란하다.
내 삶이 끝난 것 같고,
더는 뒤로 물러설 곳도 없을 것 같고,
도저히 내가 서 있는 지금의 자리가 지금껏 살아온 삶의 결과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슬펐다.
이제 모든 것은 다 끝난 것 같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것 같았으면 좀 더 어린 나이에 끝나버렸으면 좋으련만,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은 나이였다.
그래도 모든 것을 놓고 싶을 정도로 많이 아팠다.
슬펐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 그 순간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일까 돌아본다.
물론,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내가 저 슬픔의 심연을 겪어봤는데 그렇더라'도 아니다.
이를 앙다물고, 다시는 그런 치욕적인 슬픔의 자리에 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묘약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어느 누구의 위로보다 내 안에서 나를 향해 "아무 일도 아니야,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할 때,
나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이미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는 그보다도 더 큰 슬픔을 딛고 일어섰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내 마음이 그것을 온전히 이겨냈음을 알았을 때 내 안에 그 슬픔은 텅 빈 상태였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아파하는 사람을 보면,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쉽게 위로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은 말한다.
살다 보면 슬픈 거라고.
살다 보면 슬플 때도 있지만,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라고.
신은 슬픔을 이길 수 있는 묘약을 마음이라는 곳 어딘가에 숨겨두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과 싸워야 한다.
내 안의 묘약으로 나의 슬픔을 이기는 일은 최후의 수단일 것, 지금 나를 슬프게 하는 것과 맞서 싸울 것.
그러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 커서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에는 싸움을 멈출 것.
그리고 나지막하게 자신에게 말할 것.
"지금 내가 슬퍼하는 것은 이미 누군가 다 극복한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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