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은 권리다
‘쉼’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설계는 쉼을 ‘선택적 권리’로 만든다.
누군가는 앉고, 기대고, 잠시 눈을 감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서서, 멀찍이, 혹은 그 자리를 아예 피해야 한다.
적대적 디자인(Hostile Design)은 쉼의 권리를 빼앗아간다.
팔걸이는 눕지 못하게 하고,
스파이크는 앉지 못하게 하며,
소음은 머물지 못하게 한다.
쉼이 허락되지 않는 도시에서, 쉼이 필요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밀려난다.
노숙인에게 쉼은 생존의 경계다.
잠시라도 앉아 등을 기대고 몸을 추스를 곳조차 없다면,
도시는 그에게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장애인에게 쉼은 접근성의 문제다.
도달할 수 없고, 닿을 수 없으며, 앉을 수 없는 공간은
공공의 탈을 쓴 배제다.
움직임의 제한은 곧 쉼의 박탈이다.
노인에게 쉼은 이동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앉을 곳이 없다는 것은, 갈 수 있는 곳이 점점 사라진다는 뜻이다.
결국 도시의 설계는 ‘조용한 추방’으로 작동한다.
청소년에게 쉼은 연결의 공간이다.
도시에서 친구와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는 자리는, 그 자체로 숨 쉬는 법을 배우는 장소다.
그 공간마저 불편함과 감시로 뒤덮일 때, 도시는 그들의 자라남을 방해한다.
쉼이 사라진 도시는 겉보기에만 질서정연하다.
하지만 늘 누군가를 내쫓고, 숨소리를 지우며, 쉼의 권리를 빼앗은 결과이다.
하지만 쉼은 권리다.
지위나 경제력, 몸의 조건과 관계없이
누구나 도시 한복판에서 앉고, 숨 쉬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도시는 그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쉼은, 단지 피곤한 몸을 눕히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인정받고, 배제되지 않으며,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다.
쉼이 없는 곳에서는, 생각도 관계도 가능하지 않다.
쉼이 있어야 사람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쉼은 권력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정책이 허락하고, 설계가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자연스럽게 머물 수 있는 권리로 되돌려야 한다.
이제 우리는 ‘쉴 수 있는 도시’를 상상해야 한다.
누군가 밀려나지 않고, 누구든 앉을 수 있는 공간.
쉼이 낙오나 게으름이 아닌, 회복과 재생의 시간이 되는 도시.
그때 비로소, 도시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 될 것이다.
오늘 날 우리는 쉴 수 없도록 설계된 공간에서 살고 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쉴 수 없도록 길들여진 존재들이다.
도시는 잠들지 않는다.
매장은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화면은 24시간 깨어 있고,
뉴스는 매 순간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재촉한다.
쉼은 선택이 아니라 회피로 간주되고,
멈춤은 낙오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우리는 일터에서 쫓기듯 일하고,
퇴근하면 소비하듯 여가를 쓰고,
휴일에도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그렇게 쉼은 다시 하나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요가, 명상, 여행, 테라피 — 조차도 쉼을 위한 과잉노동의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진정한 쉼은
소비로부터도, 시간의 압박으로부터도, 자기계발의 명령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존재만으로 충분한 순간’,
그런 쉼은 이제 거의 모든 계층에서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도 쉼을 잃었다.
놀이는 성적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어른들도 쉼을 잃었다.
휴식은 다음 날을 위한 충전이 되었지, 그 자체로 누리는 고요는 아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느새 쉴 자리를 잃어버린 노숙자처럼,
잠깐 몸을 뉠 벤치를 찾고 있다.
우리는 강요된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도 ‘약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현대의 진짜 빈곤은 쉼의 빈곤일지 모른다.
이제 묻자.
나는 마지막으로 ‘진짜 쉼’을 느꼈던 때가 언제였는가?
멈출 수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그 평온의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