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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ON

정답에 대하여
(On the Right Answer)

정답은 오직 하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

by 김민수

우리는 자라면서 '정답'을 찾는 훈련을 받는다.

학교에서, 시험지 위에서, 사회의 규범 속에서.


늘 물음은 하나고,

그에 대한 정답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전제 아래 살아간다.

정답을 맞히는 사람이 똑똑하고,

정답을 빠르게 찾아내는 사람이 유능하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인생에도 '정답'이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삶은 시험지가 아니다.

삶의 물음은 단답형이 아니며, 해설지를 따라 풀 수 있는 공식도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답이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오답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시기에는 유익했던 판단이 다른 시기에는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은 유동적이며, 관계적이고, 복합적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정답'이 아니라 '자기의 답'을 찾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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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고,

심지어 그 정답을 남에게 강요한다.

더 나아가,

힘이 있는 자,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의 정답을 사회의 기준으로 삼으려 한다.

정치적 이념, 종교적 신념, 문화적 전통까지도 하나의 정답처럼 포장되어

타인의 생각과 삶을 평가하고 정죄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그 안에는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마음도, 다름을 존중하려는 자세도 없다.

그저 정답을 앞세운 배제와 단죄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그 자체로 분열의 역사 위에 놓여 있다.

분단의 현실은 단지 지리적 경계만이 아니라,

마음의 경계, 생각의 경계, 언어의 경계를 만들었다.

좌우의 이념은 단지 사상의 차이를 넘어서

사람을 가르고,

대화를 막고,

증오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자기 생각만이 곧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정답을 외칠수록,

타인의 말은 틀림이 되고,

결국 틀린 존재가 되어 버린다.


정답은 언제나 시대적이고 조건적이며, 나름의 맥락 속에서만 작동한다.

다양한 관점과 해석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정답주의는 결국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서로를 이해할 기회를 차단한다.


우리가 진정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이 정답인가'를 따지는 일이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정답을 주장하는 대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삶은 질문의 연속이지, 정답의 완성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시간 속에서 저마다의 답을 살아간다.

그 답이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며, 다양한 답이 공존할 수 있을 때 사회는 더 깊고 건강해진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답을 갖되, 타인의 답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답에 대하여'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정답이란 없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정직한 정답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서부터 진짜 대화는 시작된다.

이것은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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