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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ON

가시에 대하여(On Thorns)

by 김민수


찔레꽃이 피는 계절이면 어린 시절의 어느 오후가 떠오른다.

숲으로 접어드는 오솔길 초입,

땅바닥엔 아직 마르지 않은 이슬이 반짝이고,

그 옆으로 하얗게 피어난 찔레꽃 무더기가 나를 반긴다.

꽃잎은 햇살을 머금은 듯 희고 투명했다.

그 향기는 은은했지만 쉽게 날아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더 깊어지는 향기.

숨을 들이쉴 때마다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 시절, 찔레 순을 따 먹곤 했다.

입에 넣고 조용히 씹으면 봄 햇살 같은 맛이 났다.

연하고 텁텁하며, 어쩐지 오래도록 입안에 남는 그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말하지 못한 시절의 기억이 천천히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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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는 겉보기에 연약한 꽃이다.

한 손에 살짝 얹어도 금세 부서질 것만 같은 가냘픈 꽃잎.

바람에 흔들리면 곧 흩어질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연약함은 그저 꽃의 절반일 뿐이다.

그 아래, 줄기에는 생각보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숨겨져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찔레꽃을 꺾다가 그 가시에 찔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부터 찔레의 가시를 단순히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

찔레의 가시는 누군가를 찌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자 울타리다.

찔레는 가시로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동시에 다른 생명들을 위한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찔레덤불 안에는 작은 새들이 둥지를 틀고,

들고양이나 토끼 같은 작은 짐승들이 몸을 숨기기도 한다.

사나운 포식자의 눈을 피해 찔레덩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날카로운 가시는 그들에게 위협이 아니라 울타리다.

그 안에 들어오는 이들을 찌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침입하려는 자들을 막는 최소한의 방어막.

찔레의 가시는 사랑의 형태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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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며 누구나 각자의 ‘가시’를 하나씩 갖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순하고 부드럽기만 하던 마음도,

세상살이의 풍파를 겪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뾰족해지고 단단해진다.

무례한 말에 맞서야 할 때,

억울함을 감내해야 할 때,

부당한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가시를 세운다.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가시의 ‘방향’이다.

나를 지키는 가시가 어느새 남을 찌르는 창이 되지는 않았는가.

내 상처를 막기 위한 울타리가 누군가를 배제하고 밀쳐내는 담장이 되지는 않았는가.

찔레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이 물음을 내게 던진다.

가시를 가진 존재가 되되, 찔레처럼 그늘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찔레의 가시는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한 이의 방식이다.

자신이 부서지기 쉬운 꽃임을 알기에, 그 곁에 가시를 두어야 했던 것.

그 가시는 때로 차가워 보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향해 들어오는 세상의 무례함을 막고, 작은 생명들을 품을 수 있는 지혜가 된다.

가시가 있는 존재만이 꽃을 오래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상과의 경계선이 전혀 없는 이들은 쉽게 다친다.

상처가 누적되고, 때로는 그 상처가 마음속에 가시처럼 자라나기도 한다.

그러나 찔레처럼, 그 가시가 사랑과 품음의 울타리로 다시 길들여진다면, 그 삶은 향기롭고 안전해질 수 있다. 연약한 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이 될 수도 있다.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가시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내 가시는 지금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의 가시에 찔렸는가.

혹은 나는 내 가시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는가.


이런 물음들은 한없이 작아 보이지만, 우리를 향기로운 존재로 만들어가는 질문들이다.


찔레꽃이 피는 계절, 나는 다시 어린 시절의 그 숲길 앞에 선다.

조용한 오후, 오솔길 초입에 선 채 찔레꽃 향기를 맡는다.

그리움과 연민, 사랑과 침묵, 보호와 다짐이 뒤섞인 어떤 감정이 내 마음을 채운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묻는다.

“나의 가시는 지금 누구를 향해 있는가?”


그리고 조용히 다짐한다.

“연약하되 향기로운, 가시를 품되 그늘을 내어주는 존재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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