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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ON

죽음에 대하여(On Death)

죽음은 삶의 교사다

by 김민수


젊었을 땐 몰랐다.

죽음이란 단지 피해야 할 것이고, 무섭고 어두운 것이라 여겼다.

그때는 삶이 눈부시게 펼쳐진 들판 같았고, 죽음은 그 들판 끝의 낭떠러지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외면한다.

죽음을 이야기하면

불길하다며 입을 닫고,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을 보면 기운 빠지게 군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주변에서 하나둘씩 떠나는 이들의 이름이 쌓일수록,

죽음은 더 이상 낯선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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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8주기를 맞으며 나는 다시금 ‘잘 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예전엔 몰랐다.

고향에서 평생을 살며,

자식들과 함께 평생을 보내고,

병원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입원하신지 이틀 만에 조용히 떠나는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땐 그것이 그저 ‘평범한 삶’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자기를 잃지 않고 살아온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비울 수 있다.

그렇게 살고 떠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또 얼마나 드문 축복인지를.


죽음을 생각하면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스트럴드브럭(Struldbrugg)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들은 죽지 않는 존재였지만 늙고 병들어 고통만 남은 삶을 이어갔다.

죽음 없는 삶은 영원한 축복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고통이라는 것을 스위프트는 날카로운 풍자로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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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죽음은 삶의 적이 아니다.

죽음은 오히려 삶의 교사다.


죽음이 있기에 인간은 욕망을 조절하고,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을 소중히 여긴다.

죽음을 아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물러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 무덤을 파며 살아간다.

자신의 탐욕으로, 오만으로, 분노로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무너진다.

그러나 그런 삶조차, 죽음 앞에서는 멈추고 돌아보게 된다.


죽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정말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은 진지해지고, 관계는 귀해지고, 고통조차도 의미를 품게 된다.


릴케는 말했다.

“죽음은 삶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죽음은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다.

더는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모든 책임에서 놓여나는 시간,

사랑하는 이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시간.


삶이 단단하게 잘 여물었을 때,

그 여름의 열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듯 죽음은 그렇게 찾아온다.


나는 이제 소망한다.

아버지처럼,

그렇게 평범한듯 이 땅의 소풍을 마치기를 기도한다.


죽음에 대한 묵상은 결국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이 죽을 수 있을지를 묻는 일이며,

그 질문은 곧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진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사람은 지금 주어진 하루를 귀히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묵상하면서

더욱 성실하게, 더욱 단정하게, 우리 삶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럽게 딛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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