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1장 고통은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욥의 항변과 기도가 이어진 후, 세 번째 친구 소발이 나선다.
그는 엘리바스나 빌닷보다 훨씬 격정적인 어조로 욥을 몰아세운다.
그의 첫 마디는 비판이 아니라 거의 조롱에 가깝다.
“말이 많으니 대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다스러운 사람이 정의로울 수 있겠는가?”(11:2)
소발은 욥의 탄식과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욥의 절규는 그에게 교만과 허위의 언사로 보였다.
특히 욥이 자신의 무죄를 고백하며 고통의 의미를 묻는 그 말들조차,
소발은 용납할 수가 없다.
소발은 단호하다.
그는 욥의 고통을 죄의 결과로 확신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고, 입술을 열어 그대에게 일러 주신다면!
그대에게 지혜의 숨은 이야기를 해 주신다면!....
그대가 하나님의 깊은 뜻읋 알아낼 수 있겠는가?”(11:5-7요약)
이 말은 위로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정죄다.
욥이 지금 고통당하는 이유는 과거의 죄 때문이며,
지금 받는 고난은 그 죄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편이라는 것이다.
그는 욥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하면 회복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소발의 논리는 명확하고 일관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통은 죄의 결과’이며, ‘회개는 회복의 길’이라는 도식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번영신학의 구조와 닮아 있다.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복의 공식’이다.
소발은 이 복의 공식을 그대로 욥에게 적용한다.
문제는 그의 공식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데 있다.
인생의 고통은 그렇게 단순히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소발의 신학은 이론적으로는 정연하지만, 고통의 현장에서는 무자비하다.
그는 하나님을 마치 수학적 계산이 가능한 공정한 재판관처럼 묘사하지만,
그 하나님은 자비와 공감, 침묵 속의 동행을 모르는 신이다.
더 큰 문제는 소발의 '확신' 자체에 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래서 듣지 않고, 묻지 않고, 오직 단정한다.
이런 자기 확신은 흔히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심리적 오류로 이어진다.1)
이는 이미 가진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그에 반하는 증거는 무시하는 태도이다.
소발의 태도는 확증편향의 전형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믿는 자신 안에 갇혀 있으며, 그 결과 타자인 욥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은 완결되어 있지만, 열린 마음이 없다.
그는 욥이 겪는 실존적 고통의 무게 앞에서 잠시 멈추거나, 경청하거나, 동행하려 하지 않는다.
욥은 죄인으로 단정되었고, 그의 고통은 그에 대한 정당한 심판이다.
그렇게 '결론'만을 내리려는 태도는 고통 받는 이를 더욱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욥은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며 고통의 의미를 묻는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고 확신하기에, 더 깊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하나님께 따지고, 때로 원망하고, 침묵에 분노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과도 같은 현실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관계를 단절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면 이런 항변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발은 이 절규조차 신성모독이라 여긴다.
그는 하나님을 변호하려 들지만, 실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심판하려는 것이다.
고통은 그런 식으로 계산되어 설명되지 않는다.
소발은 진리를 말하는 듯했지만, 그의 말에는 진리의 생명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고통 받는 자의 자리에 서지 않기 때문이다.
소발에게는 신학은 있을지 몰라도, 공감이 없고, 경청이 없고, 연대가 없다.
그리고 그에게는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Bjorn Natthiko Lindeblad)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생각을 모두 믿어버린다면
우리 삶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에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게 되지요.
말 그대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2)
김기석 목사는 『최소한의 품격』이라는 책에서 ‘자기 확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갇혀 있으면서도 갇힌 줄 모른다.
세상의 진실을 보고 있는 것은 자기들뿐이라는 오도된 선지자 의식으로 인해 그들은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3)
확증편향에 빠진 소발이 만일 욥과 같은 처지에 있었더라면,
그는 욥처럼 하나님께 항변할 수 있었을까?
그냥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침묵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았을까?
욥이 처한 고통의 시간은 정죄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 속 동행의 시간이다.
욥은 이 신비를 말없이 감내하며 하나님과 함께 그 시간을 건너려 한다.
고통의 시간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시간이며,
고통의 시간은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하나남의 현존을 가디라는 시간이며,
때로는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 속에서 아무런 답을 듣지 못해 처절하게 절규하는 시간이다.
그 절규를 죄라고, 불경스럽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도 소발이 되고 말 것이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소발의 역사를 너무도 많이 가지고 산다.
자기의 생각과 다르면 혐오하고 차별하고 이념적인 잣대로 재단하는데 능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발의 언어가 난무한다.
그래, 그 말이 옳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삶뿐 아니라 역사도.
그러니 너무 쉽게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말하지 말라.
소발은 너무 많이 말했고, 너무 확신했고, 너무 쉽게 판단했다.
진실은 그 확신의 너머에 있었다.
욥기 11장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소발의 신학에 기대어 타인의 고통을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고통의 자리에서 말보다 더 절실한 것은
함께 있어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로 진리는 말이 아니라
침묵과 동행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욥 곁에 계셨다.
주:
1)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기존에 갖고 있던 신념을 강화하는 정보만을 수용하고, 그에 반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심리 현상. 이로 인해 사람은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기존 신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사고하게 된다. 신앙 안에서도 이 확증편향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거나, 타인의 고통을 잘못 해석하는 위험을 낳을 수 있다.
2)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Bjorn Natthiko Lindeblad, 1961~2022),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박미경 옮김, 다산초당, 2020. P.60.
3) 김기석, 『최소한의 품격』, 현암사, 2025, P.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