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2장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엘리바스가 다시 입을 연다.
이제 그의 말에는 처음에 있었던 신중함조차도 사라졌다.
그는 욥이 고난 받는 이유를 단정한다.
“너는 분명 죄인이다.”
심지어 구체적인 죄목까지 열거한다.
“그대가 형제자매를 까닭 없이 볼모를 잡았고,
헐벗은 사람의 옷을 벗겼거든.
지친 사람에게 그대가 물을 주어 마시게 하지 않았고,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 대접하기를 마다했거든......
남편 여윈 여자들을 그대가 빈손으로 내보냈고,
부모 없는 아이들의 팔을 부러뜨렸거든.”(22:6–9 요약)
그러나 이 모든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욥은 자기를 부정한 적이 없고, 의로웠다고 계속해서 고백해 왔다.
엘리바스는 지금,
자신의 신학적 판단 위에 하나님의 심판 명분을 쌓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람이 쓸데가 있겠는가?”(22:2)
이 물음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오해일 뿐 아니라 왜곡이다.
“샷다이께 기쁜 일이겠는가,
그대가 올바르다는 것이?
그분께 이득이 되겠는가,
그대가 그대의 길을 흠 없이 걷는다는 것이?”(22:3)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자족성과 절대성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인간 존재의 가치와 존엄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쓸모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쓸모를 발견하신다.
엘리바스의 논리는 신의 절대성을 강조하다가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 이유를 삭제하는 폭력으로 변한다.
욥기는 이 말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는 쓸모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쓸모의 존재요, 귀한 존재다.
그냥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요, 쓸모의 존재다.
엘리바스는 욥을 향한 신랄한 공격을 정의와 신앙의 이름으로 수행한다.
그는 진실을 묻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결과로부터 출발하여 죄를 구성해 낸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인 가치로 욥을 판단한다.
심리학자 살보 노에(Salvo Noe, 1970~)는 이렇게 말한다.
‘판단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판단한다면
당신의 가치 체계를 적용하고 있다는 뜻이다.’1)
엘리바스는 거침없이 말한다.
“그대의 악함이 지나치지 않은가?
그대의 잘못에는 끝이 없는가?”(22:5)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의 신학적인 판단으로 욥을 정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소위 전통으로 여겨지는 신앙이 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종교적 가치를 수호한다는 이름으로 억압과 배제를 신앙적인 행위로 포장한 일들은 우리 역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유교적 정치 이념(성리학)을 ‘정통’이라 하여 훈구파, 사림파 간의 정치적 숙청을 감행한 일, 천주교를 ‘서학’이라 하여 신유박해(1801), 병인박해(1866) 등에서 수많은 신자들을 국가 질서와 정통 유교 윤리를 어겼다는 명목으로 죽인 일,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던 일, 이승만 정권에서 반공이데올로기와 교회가 결합되면서 ‘신앙=애국=반공’라는 도식 속에서 폭력과 학살을 정당화하여 제주 4.3사건, 국민보도연맹 사건 등에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적극 가담한 일,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침묵하거나 동조하고, 불의한 권력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어준 일, 지금도 광장에서 행해지는 성소수자, 이슬람, 여성, 청년 등을 향한 혐오와 배제의 발언들의 근본에는 ‘신앙의 전통을 수호한다’는 신학적 판단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판단은 칼이 되어 하나님께서 온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생명들을 죽이는 흉기가 되어버렸다.
엘리바스는 덧붙인다.
“그대가 그분께 기도하면,
그분이 그대 말을 들으실 것이네.”(22:27)
그러나 욥은 이미 기도하지 않았는가?
엘리바스는
말만 하고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말하는 방식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고, 관계성 속에 뿌리내리지도 않았으며,
자기의 신학적 판단에 기초위에 세운 하나님을 이용해 사람을 찍어 누르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하나님께 사람이 쓸모 있느냐”는 질문은 겸손을 가장한 신앙의 오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전에(엡 1:4)’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
그 계획 속에 있는 존재가 어찌 쓸모없겠는가?
엘리바스는 더 이상 욥에게 묻지 않고,
자기의 생각으로 사람을 판단하며,
자기가 생각하는 정의로 사람을 해석하고 정죄한다.
그러나
상호관계적인 삶은 자기의 생각을 설명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부터 오며,
타인의 말과 행동에 귀 기울이는 태도와
나와 너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있다.
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이다.
철학자 김진영(1952~2018)의 애도 일기 『아침의 피아노』 ‘164’에는 이런 일기가 있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2)
그렇다.
우리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것들’이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주:
[1] 살보 노에, 『판단 전에 잠깐!』, 바오로딸, 2022, 김홍래 옮김, p.22.
[2]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2022,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