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3장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 두 이레 강아지 만큼
욥은 이제 친구들과의 논쟁을 넘어,
다시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의 찾음은 더 이상 변론을 위한 논리도,
자기 정당화를 위한 언어도 아니다.
그의 입에서는 사라진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과 탄식,
그리고 마지막 신뢰의 고백이 흘러나온다.
“오늘도 나는 대드네.
탄식하네.
내 손이 무거워 한숨이 나네.”(23:2)
욥은 하나님의 자비를 믿으며,
그분을 직접 만나 뵙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분 만나 뵐 길을 알아서,
그분 계시는 곳까지 나아갈 수 있다면!
그러면 내 사정을 그 분 앞에 밝히고,
내 입으로 맞받아칠 말을 아뢸 텐데.”(23:3,4)
그러나 그가 바라는 것은 재판장의 논리 싸움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하나님,
자신의 속마음을 진심으로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
“큰 힘으로 그분이 나와 다투시겠는가?
아니야.
그분은 참으로 나에게 마음 써 주실 것이네.”(23:6)
욥의 이 고백은 신앙의 마지막 끈이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자신의 사정을 아시며,
힘으로 억누르기보다 진심으로 귀 기울이시는 분임을 신뢰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경청의 신학’을 마주한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
억울한 자의 신음에 응답하시는 분이다.
욥은 그 하나님을 기억하며,
침묵 속에서도 그분의 들으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때보다,
이해하지 못한 채 신뢰할 때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욥은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분이 북쪽으로 움직이셔도 내가 눈여겨보지 못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셔도 내가 보지 못하네.” (23:9)
하나님은 마치 숨바꼭질을 하시는 듯하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고백한다.
“그러나 그분이 내 길을 아신다네.
나를 검증해 보셨다네.
내가 황금 같음이 드러날 것이네.” (23:10)
하나님은 숨어 계신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길을 알고 계시며,
결국 자신을 알아주실 것이라는 고백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깊이다.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욥의 신앙이다.
욥은 또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 앞에서 깜짝 놀랐다네.
깨닫고 보니 그분이 무서워진다네.”(23:15)
이 고백은 역설적이다.
하나님은 욥의 고통을 끝장내지도 않으시고,
그렇다고 완전히 어둠 속에 가두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여전히 무언가를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 뜻을 온전히 알 수 없기에 욥은 떤다.
욥이 떤 것은 하나님의 전능함 때문이 아니라,
그 뜻을 모른 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그 떨림은 경외와 신뢰, 두려움과 소망이 뒤섞인 신앙인의 떨림이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말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다.
그것은 모든 참된 예술과 과학의 근원이다.
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더 이상 멈추어 경이로움을 느끼고 경외감에 휩싸일 수 없는 사람은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눈은 감겨 있다.”1)
그가 말한 ‘신비’는 물리학의 경계를 넘는 경외의 감정이다.
그는 우주의 법칙 속에서, 별빛과 원자의 질서 속에서
자신을 초월한 존재를 느꼈다.
하지만
경외심은 거대한 우주를 바라볼 때만 드는 것은 아니다.
한 송이 들꽃이 피어나는 그 순간,
새벽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하나에서도
하나님은 세미하게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그랬다.
불과 지진, 큰 소리 속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세미한 소리’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꼈다(열왕기상 19:12).
하나님은 세상을 뚫고 울리는 나팔소리이시기도 하지만,
우리의 내면을 스치는 세미한 속삭임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은
무릎 꿇고 웅대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허리를 숙여 작은 꽃을 들여다보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 작은 떨림 안에,
하나님의 숨결이 있다.
구상 시인의 시 『마음의 눈만 뜬다면』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
마음의 눈을 뜬다.
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의 만물이
그 실용적 이름에서 벗어나
저마다 총총한 별처럼 빛나서
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기 그지 없다.
...
(중략)
...
만물의 그 시원(始原)의 빛에 눈을 뜬 나,
이제 세상 모든 것이 기적이요,
신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으며
더구나 저 영원 속에서 나와 저들이
그 완성될 모습을 떠올리면 황홀해진다.2)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 1961~)는
‘신비로운 경험’의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신비로운 경험을 하는 순간이란
늘 보던 눈에 익은 현실의 껍질이 깨지면서
알 수 없는 어딘가로부터 어떤 빛이 비추어진다고 느끼는 순간을 말한다.”3)
하나님의 신비는,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우주의 질서 앞에 경외심을 품는 이들에게,
마음의 눈을 뜬 이들에게
어딘가로부터 와서 빛을 비춘다.
그래서 신앙이란,
이해 너머의 신비 앞에 멈추어 서서,
듣고, 바라보며, 마침내 깨닫는 것이다.
모든 것이 기적임을.
욥은 깨달았다.
자신의 고난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그 고난의 여정은 새로운 눈뜸과 거듭남의 길이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마침내, 모든 것이 신비입니다.”
주:
[1] Albert Einstein, 『The World As I See It』, Mein Weltbild, 1931.
[2] 『한국대표시인 101선집 구상』, 문학사상사, 2002, PP.79-80 참조.
[3] 데이비드 브룩스 『두 번째 산』, 부키, 이경식 옮김, 2020, p.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