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1장 나는 모르지만, 너희처럼 말하진 않는다
욥은 다시 입을 연다.
친구들의 끈질긴 일반화, 억지스런 신학적 해석에 더는 응수할 힘도 없다.
이제 그는 말한다.
“내 말을 좀 들어보게.
그것이 그대들이 해줄 유일한 위로일 것이네.” (21:2)
설명하고 해명하는 자리에서 그는 물러선다.
대신 이해되지 않는 삶 그 자체를 정면으로 끌어안는다.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고난,
하나님의 뜻으로 환원할 수 없는 현실.
그는 차분하게 묻는다.
“어째서 불의한 자들이 살아남는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강성해지는가?” (21:7)
그는 현실을 본다.
악인들은 벌을 받지 않는다.
그들의 자식은 든든하고, 집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며,
평안히 살다가 조용히 죽는다.
(21:8–13 요약)
욥은 말한다.
세상은 너희가 말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네.
‘우리에게서 떠나주세요. 당신의 길은 알고 싶지 않아요.’” (21:14)
하나님 없이도 잘 사는 이들,
형통을 자신의 공로라 여기는 자들,
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욥의 정직함이다.
욥은 이해할 수 없기에 의심하고,
설명할 수 없기에 묻는다.
전통적 신앙은 의심을 금기로 여기곤 한다.
이해하지 못해도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믿음이라기보다,
무지에 기대는 맹신에 가깝다.
진정한 믿음은 이해할 수 없음 앞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용기이고,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묻는 태도이다.
신앙은 확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과 의심 사이에서 자라난다.
그 의심이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않을 때,
오히려 그 의심은 신앙의 뿌리가 된다.
욥은 친구들의 말에 속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된,
도식적 위로, 일방적 해석,
정의와 질서를 빙자한 자기 합리화.
그 모든 것이 고통 앞에서는 거짓임을 욥은 꿰뚫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그런 헛된 말로 나를 위로하려 하는가?
그대들이 해 주는 말은 도무지 미덥지 않네.” (21:34)
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삶의 불합리를, 그 모순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말없이 버틴다.
신앙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이해할 수 없음이 너무 많기에, 우리는 ‘신비’ 앞에 선다.
폴 틸리히는 “신은 우리가 가장 깊이 묻는 질문 그 자체이며,
그 물음 너머로부터 오는 초월적 응답”이라고 말한다.1)
신은 우리가 소유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하게 하고, 우리 존재를 넘어서는 궁극적 실재(The Ground of Being)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모든 것을 아는 능력이 아니라,
알 수 없음의 경외 속에 머무는 능력이다.
욥은 그 경계에 서 있다.
묻되, 강요하지 않고
절규하되, 포기하지 않으며
침묵하되, 떠나지 않는다.
그는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고,
그 말 속에,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가장 깊은 신뢰가 담겨 있다.
이해되지 않는 삶.
그것이 욥의 삶이며, 곧 우리의 삶이다.
그러나 그 삶을 억지 해석으로 포장하려는 모든 시도는
고통을 지우고, 하나님을 왜곡하는 일이다.
욥은 말한다.
“나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대려는 태도.
거짓된 위로를 거절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견디며,
여전히 하나님을 찾는 자리.
거기 의인이 선다.
욥기 21장은 말한다.
신앙이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삶 앞에서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라고.
그리고 의심이야말로, 그 용기를 잃지 않게 하는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시편 기자도 욥과 같은 고백을 한다.
“너무 놀랍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너무 높이 있어서 내가 거기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시편 139:6)
주:
[1]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ume 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Chapter 2: "God as the Ground of Be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