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9장 흙먼지 속에서도 나는 일어설 것이다
욥은 너무 지쳐 있었다.
몸의 병보다 더 아픈 것은가까웠던 이들이 그의 마음에 던진 돌이었다.
“그대들은 언제까지 이 사람을 괴롭히려 하는가?
말로써 나를 쳐부수려 하는가?” (19:2)
위로를 위해 찾아온 친구들이 이제는 정죄의 칼을 쥐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처럼 욥을 심판하고,
그의 수치를 즐기듯 들춰내며,
한 사람의 고통을 ‘교훈의 재료’로 삼는다.
욥은 친구들의 말보다,
그 말 아래 깔린 마음의 태도, 교만과 냉소가 더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그대들이 참으로 나에게 건방지게 굴면서,
나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들이대려 한다고 하세.”(19:5)
더 이상 아무도 욥의 편이 아니다
욥은 자기 삶의 붕괴를 고백한다.
가족, 종, 친구, 심지어 아내와 아이들까지 그를 비웃고 외면한다.
그는 철저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자, 기억에서 지워진 자, 부정된 자가 되었다.
“내 살갗과 살에 내 뼈가 달라붙었고,
잇몸만 남은 벌거숭이가 되었다네.”(19:20)
그의 고백은 생존 자체가 기적인,인간 존재의 한계점에 선 자의 절절한 신음이다.
그는 말한다.“제발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그러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믿음이 살아 숨 쉰다
욥은 가장 깊은 버림의 골짜기에서,
세상 누구도 자기 편이 아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정의에 대한 가장 깊은 신앙을 고백한다.
“나는 안다네.
나를 구해 주실 분이 살아 계셔서
마침내 흙먼지 위로 일어서실 것임을!”(19:25)
이 구절은 단순한 ‘회복의 약속’이 아니다.
그 어떤 손도 내밀지 않는 절대고독의 자리에서,
관계의 실낱같은 끈을 놓지 않겠다는 신앙의 외침이다.
이 신앙은 이해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의 심연에서 솟아난다.
욥의 확신과 희망은 결과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 살아 있다는 내면의 고백이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욥은 인과응보에 근거한 세 친구들의 공격에 맞서지만,
결국 그들과 같은 프레임으로 반격한다.
“그렇지만 그대들은 칼을 무서워하게!
노여움은 칼의 형벌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네,
심판이 있음을 그대들이 깨달게 되도록.”(19:29)
그는 자기를 조롱한 자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죄가 있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도식을 역전시켜 상대에게 돌린다.
그는 아직 완전히 인과응보의 신학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 앞에서 이 신학이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흔들림’ 안에 욥의 신앙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고백은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분을 ‘구원자’라고 부르는 모순의 자리에서 생겨난다.
욥은 인간의 판단과 정죄 한복판에서 자기 존재의 무게를 하나님 앞에 맡긴다.
그의 고백은 신학이나 논리가 아니라, 피 묻은 신앙이다.
욥은 친구들과 하나님, 세상 모두에게 거절당한 사람으로 서 있다.
욥의 고백은
신학적 체계나 변증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 피 흘리며 드러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항의하고 원망하지만, 동시에 그분만을 의지한다.
하나님이 그물로 덮어씌우신 분이라 말하면서,
그분이 구원자로 흙먼지 위에 일어나실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토록 모순된 듯한 신앙이야말로 살아 있는 신앙이다.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손에, 마지막으로 남은 신뢰처럼 움켜쥔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안다네.
나를 구해주실 분이 살아계셔서
마침내 흙먼지 위로 일어서실 것임을!”(19:25)
이 말은 모든 시대의 신앙인들이 마음속에 새겨야 할 고백이다.
왜냐하면,
결과가 아닌 관계,
이해가 아닌 신뢰, 논리가 아닌 존재로서 드리는 믿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랍비 헤럴드 쿠쉬너(Harold S. Kushner, 1935~2023)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라는 책에서 좋은 사람도 악한 사람도 똑같은 자연재해로 고통을 받는 세상은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자연의 현상에 면역력을 가지게 되는 세상이라면 그것을 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자연재해는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자연의 행위이며, 자연은 가치판단에 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휘젓고 다닐 뿐이라는 것이다.1)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행위는
오히려 지진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재건하는 사람들의 용기이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이웃을 돕기에 바쁜 손길이다.”2)
하나님은
특정인에게 특정한 이유로 상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보다는,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시며,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동행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고통을 당하며 감내하는 사람들에게
그 아픔과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시다.
욥은
내 편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마침내 흙먼지 위로 일어서시어 도와주실 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주:
[1] 헤럴드 쿠쉬너,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김하범 옭김, 도서출판 창, 2006. P.91 발췌요약.
[2] 위의 책, P.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