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8장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두 번째로 입을 연 빌닷은 이제 더 이상 우회하지 않는다.
그는 악인의 말로를 설파하는 듯 보이지만,
그 묘사는 너무도 정확히 욥의 현실과 겹친다.
“불의한 사람들의 빛은 꺼지고,
그의 천막 안에서는 빛이 어두워 지고,
그의 기운찬 발걸음이 느려지고,
그는 발이 걸려 그물로 끌려 들어가고,
발꿈치가 올무에 걸리고,
무서운 일들이 사방에서 그를 겁주고,
재난이 그를 삼키려 하고,
그를 기억하는 일이 땅에서 사라지고....”(18:5–17 요약)
빌닷은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이 고통스러운 ‘그’가 바로 욥임을 암시한다.
정면 공격은 아니지만, 간접적이어서 더 깊게 욥의 가슴을 찌르는 비난이다.
고통당하는 자 앞에서
‘남 얘기하듯’ 고통 받는 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주 깊은 모멸감을 준다.
빌닷의 신학은 아주 간단하다.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의 단순한 인과응보 신학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번영신학은 그 대표적인 예다.
‘믿으면 부자가 된다’,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
‘헌금하면 복을 받는다’는 식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빌닷의 사고방식과 닮아 있다.
이러한 논리는 실패자와 약자를 죄인으로 간주하고,
물질적 성공을 축복의 징표로 간주하게 만든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는 설 자리를 잃고,
‘형통 = 의로움’이라는 왜곡된 공식을 통해 사람들을 신앙적으로 억압하게 된다.
그들에게 고통은 죄의 대가요, 악인은 결국 망한다.
그러므로 망했다면, 악인이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를 자신의 도식에 가두고, 인간의 말로(죽음, 실패, 질병)를 영적 상태의 증거로 간주한다. 오늘날에도 누군가 실패하면 “믿음이 부족해서”, “죄가 있어서”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질병, 가난, 실패를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벌로 보는 시선은 빌닷의 신학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빌닷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진실이 아니다.
형통은 의로움의 증거가 아닐 수 있으며, 고난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즉각적인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천천히 오며, 오래 참은 인내와 사랑 안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하지만,
빌닷은 이 침묵을 기다리지 못한다.
그는 욥의 고통을 말로의 형벌로 판단한다.
그러나 고통의 현실이나 비참한 말로가 언제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현실은 빌닷이 말한 것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오히려 멸시받는다.
우리는
불의한 자가 득세하고, 정의는 짓밟히고, 의인은 피 흘리는 역사를 보아왔고,
심지어는 그런 현실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리가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다.
욥도 지금 그런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욥 자신 또한 과거에는 빌닷과 유사한
인과응보의 신학을 내면화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녀의 죽음 이후,
그는 그들이 죄를 지었을까 두려워 늘 번제를 드리며 대비했으며(욥 1:5),
고난이 닥치자 스스로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는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욥 3장 이하).
욥은 의로움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고통이 어떤 ‘숨겨진 죄’에 대한 징벌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놓지 못한다.
결국,
그는 빌닷의 칼날 같은 말에 분노하면서도,
그 말에 내재된 세계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것이 바로 욥의 더 깊은 고통이다.
단순히 외적인 재난이 아니라,
자신의 신학과 현실 사이에서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요전히 자신의 무고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로 서있는 것이다.
빌닷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논리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 설명은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욥에게는 칼날이 되고,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의 교리에 종속된다.
현재의 상황이나 말로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고통이 곧 죄의 증거는 아니다.
형통이 곧 의로움의 증표는 아니다.
불의한 세상의 현실과 말로를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넘은 폭력이다.
빌닷은 하나님의 뜻을 설파하려다
하나님의 자비를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지 않으려는 사람으로 남는다.
진실은 종종 실패한 자의 입에서 나온다.
역사는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 속에서 비록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패한 자들이 끝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로 판결되어야 한다.
욥기 18장은,
보이는 현실이나 결과로 정답을 말하려는 자들의
어리석음뿐 아니라 그들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장이다.
신앙은 해답을 말하는 입술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드는 손이다.
말은 정의를 설명할 수 있지만,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랑만이 고통을 품을 수 있다.
빌닷은 자신의 신학적 확신을 말했지만, 그 속엔 자비가 없었고,
욥은 무너졌지만, 끝까지 하나님 앞에 남아 있었다.
결국 진실은
말로 단정하는 자가 아니라,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신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