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을 주는 위로자

욥기 16장-위로를 가장한 폭력의 언어

by 김민수


욥은 다시 입을 연다.
그러나 그 말은 친구들을 향한 반박이기 이전에,
위로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상처를 주는 자들에 대한 깊은 고발이다.


“그대들은 모두 괴로움을 주는 위로자군!” (16:2)


그의 말에는 피로와 슬픔이 고여 있다.
처음에는 침묵으로 곁에 있어주던 친구들
이제는 말로 그를 짓누르고 있다.
위로하겠다는 말 속에 오히려 칼날을 숨긴 채, 고통을 더하고 있다.


욥은 말한다.
“그대들이 내 자리에 있었더라면,

나 또한 그대들처럼 말했을 테지.

그대들에게 여러 말을 늘어놓고, 그대들에게 머리를 흔들어 댔을 테지.

내 입으로 그대들에게 힘이 되려 하고,

내 입술의 위로로 괴로움을 덜어 주려 했을 테지.”(16:4,5)


그는 지금 ‘입으로 하는 신앙’과 ‘마음으로 하는 신앙’ 사이의 깊은 간극을 말하고 있다.


욥은 이제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그리고 절규하듯 고백한다.

“참으로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지치게 만드셨다네.

하나님이 노여움으로 나를 잡아 찢으시고 적으로 대하신다네.

나를 보고 이를 가신다네.

나의 원수가 되셔서,

나에게 보내는 눈길을 무섭게 하신다네.

잘못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를 넘겨주셨고,

나를 밀어 불의한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게 하셨다네.” (16:7,9,11)


그는 고통 받는 육체를
마치 사자에게 찢긴 가죽조각처럼 묘사한다.
고통은 이제 참기 어려운 지경이다.
그러나 이 절규 속에도 하나님을 향한 관계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고통의 근원을 하나님께 묻고자 한다.
사람의 법정이 아닌,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고 싶어 한다.


욥기 16장은 단순한 항변을 넘어,
고통 받는 자의 기도가 처음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지점이다.
욥기 16장은 단순한 항변을 넘어, 고통 받는 자의 기도가 처음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지점이다. 욥은 이제 자신의 ‘증인’과 ‘중보자’가 하나님 안에 있기를 바란다.


“또한, 이보게나,

하늘에는 나의 증인이 계신다네!

나를 위해 증언하실 분이 높은 곳에 계신다네!”(16:19)


이 고백은
욥의 신앙이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자 한다. 절망하면서도,

그 하나님 외에는 기댈 데가 없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말은 모순 같지만, 그 모순 안에 믿음의 진실이 있다.

욥은 점점 사람의 위로에서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린다.
하나님께 항변하면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리처드 로어는 『위쪽으로 떨어지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복음은 인생의 비극임을 용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었고, 이 비극에서조차 성숙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이 위대한 전환이다! 모든 것이 우리가 과연 내려감(down)을 올라감(up)으로 볼 것인지 또는 칼 융이 말하는 ‘걸려 넘어진 곳에서 순금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에 달려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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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삶의 비극을 용납하지 못하는 곳에 ‘복음’은 없다.

비극조차도 용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처음엔 곁에 있어주던 친구들이, 어느새 말로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비극을 용납할 줄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고통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그들의 위로는 결국 정죄의 말로 변질된다. 그들은 헨리 나우웬이 ‘단절된 세상에서의 사역’이라는 글에서 말하는 ‘핵 인간(nuclear man)’과 빼닮았다. 그들은 역사적 단절, 연속 의식의 결여에 빠져 있으며, 단편화된 신학적인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다.2) 그리하여 새로운 불멸에 대한 추구를 하는 듯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그들의 삶을 파멸로 이끌 뿐이 아니라, 그들의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정죄하는 욥을 더욱 깊은 고통의 심연으로 내모는 것이다.


욥은 말한다.
“말이 아니라, 침묵과 눈물로 함께 있어주는 것이 위로였다.”
말로 전하는 위로는 때때로 고통을 회피하거나, 해석하려는 가면이 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위로’를 가장한 폭력은 흔하다.

“이해하지만, 그건 아니야.”

“그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그만 좀 해. 다 지난 일이야.”


이런 말들은 이해를 전제하지만, 실은 고통을 억누르고, 그 정당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는 이들에게,

이태원 참사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에게,

아침에 출근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도

이러한 말들이 쏟아졌다.

그들의 고통은 제대로 듣지 않으면서, 위로를 빙자해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다.

사회의 기득권이나 특정 권력,

이념을 지키기 위한 태도는 욥의 친구들이 보여준 ‘정죄의 위로’와 닮아 있다.

이런 식의 정죄와 위로는 모두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다.

욥은 이제 더 이상 친구들에게 기대지 않는다.

그는 하늘에 있는 중보자에게 자신의 말이 닿기를, 자신의 억울함이 기억되기를 기도한다.


상처 입은 이들의 주님,
나의 말이 칼날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내 입술이 정의를 말하면서도 누군가의 마음을 찌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선의가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
내가 위로자가 되고 싶을 때,
위로라는 이름으로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고통을 해석하려 들지 않고,
그저 함께 아파할 수 있게 하소서.
눈물 앞에 설명을 내려놓게 하시고,
침묵 가운데 마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소서.
말 대신, 곁에 머무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욥 곁에 있었던 친구들처럼,
처음엔 위로하고자 했지만 결국 정죄의 자리에 서지 않게 하소서.
고통의 의미를 덧씌우는 교만이 아니라,
그저 아픔 곁에 함께 앉을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세월호의 유가족 앞에서,
이태원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 앞에서,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게 하소서.
진정한 위로자는 ‘위로’라는 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함께 무릎 꿇는 자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나를 위로의 자리에 세우셨다면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분석이 아니라 동행으로,
정답이 아니라 기도로 서게 하소서.

주:

[1] 리처드 로어, 『위쪽으로 떨어지다』, 국민북스, 이현주 옮김, 2018, p.106.

[2] 헨리 나우웬, 『상처입은 치유자』, 두란노, 최원준 옮김, 2019, pp.13~28 요약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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