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5장- 더 날카로워진 정죄의 말
욥이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고백한 슬픔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엘리바스가 다시 입을 연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제 초기의 조심스러운 위로나 관조적 충고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번에 등장한 엘리바스는 거친 어조로, 날 선 정죄의 말들을 쏟아낸다.
그는 욥을 향해 단언하듯 말한다.
“그대의 허물이 그대의 입을 가르치고,
꾀보들의 입술을 그대가 골랐구나.
그대를 불의하다고 한 것은 그대의 입이지 내가 아니라네.
그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은 그대의 입술이라네.” (15:5,6)
즉, 욥의 탄식과 고백은 자기변명을 넘어 스스로를 정죄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 속 절규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로,
지혜 없는 자의 ‘교만한 신성모독’으로 해석한다.
이로써 그는 이제 위로자의 자리에서 정죄자의 자리에 앉았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이 죄 때문이며,
그의 말이 죄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단언한다.
“하나님의 하늘 회의에 그대가 참석한다는 것인가?
지혜를 그대가 낚아챈다는 것인가?”(15:8)
이 말은 단순한 반론이 아니다.
욥의 신앙 자체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하고 모독으로 규정하는 심각한 비난이다.
엘리바스의 눈에는 욥의 탄식과 질문이 더 이상 고통 속 진실한 신앙이 아니라,
도를 넘은 오만이자 신을 모독하는 반역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제 엘리바스는 더 이상 욥의 친구가 아니다.
그는 자기 신학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고통 받는 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자가 되었다.
엘리바스는 이제 신학의 이데올로그로 변모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학을 고수하기 위해,
욥이라는 고통 받는 친구를 신성모독자이자 악인으로 몰아간다.
이는 자신의 ‘신학’ 정당화하면서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정죄하는 행동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난 모든 비극은 여기에서 기인했다.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과 종교재판, 식민주의 선교와 원주민 탄압 등은
이런 신학의 바탕 속에서 정당성을 얻었던 것이다.
오늘 날에도 엘리바스적 신학은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와 차별을 자행하는 곳에서,
정치권력과 결탁한 강단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신학은 삶을 해석하는 도구이지, 사람을 단죄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은 생명을 살리는 학문일 때만 정당성을 얻는다.
엘리바스는 여기에 ‘악인의 말로’를 더하여 말한다.
‘악인은 늘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결국 하나님의 진노 속에 멸망한다.’는 것이다.
이 묘사들은 구체적이지 않지만, 명확한 목표를 향하고 있다.
이 모든 묘사들은 욥의 현재 상태를 겨냥한 말이다.
즉, ‘지금 네가 그런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은, 네가 바로 그 악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엘리바스는 이전보다 훨씬 격렬하게 욥의 말을 신성 모독으로 해석하고,
그의 고통을 죄의 결과로 결론짓는다.
엘리바스는 더 이상 욥의 위로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에 갇혀 진실을 외면한 자가 되었고 정죄하는 자가 되었다.
그의 말은 정답 같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자에게는 차가운 비난과 혐오일 뿐이었다.
그가 볼 때 욥은 여전히 죄를 고백하지 않고 죄를 쌓는다.
말을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 끝까지 따지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욥에게 말한다.
“헛된 것을 그가 믿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잘못에 빠져 있다네.
그렇게 해서 그가 받은 것은 헛된 것뿐이네.”(15:31)
욥은 ‘헛된 믿음’에 빠졌고, 그 결과 역시 ‘헛된 것’이 될 거라는 선언이다.
엘리바스는 이처럼 욥의 고통을 완전히 ‘신학적 범죄’로 치부해 버린다.
그는 욥의 말에 숨겨진 아픔을 읽지 못하고, 오직 신학적 기준으로만 재단한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
친구를 의심하고, 결국 정죄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의 언어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안엔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다.
그는 신학을 먼저 두고, 그 신학에 욥을 끼워 맞추려 한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슬픔과 절망, 존재의 흔들림은 무시되거나 부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신학이 먼저인가, 인간학이 먼저인가?
실상, 신학은 인간학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삶을 비껴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과 눈물, 질문과 절규는 신학이 출발해야 할 자리다.
신학은 교리를 지키는 방어막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의 절규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신학의 이름으로 인간을 희생시키는 시대를 살아간다.
교리를 위해, 교단을 위해, 조직을 위해,
누군가를 비난하고, 침묵시키고, 밀어내는 현실이다.
그 모든 것이 마치 ‘신학적 판단’인 것처럼 포장된다.
신학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고 배제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엘리바스가 보여주는 ‘위장된 신학’의 본질이다.
폴 틸리히(1886~1965)는
“신학이 신의 형상을 지키려다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신앙의 타락”이라 경고했다.1)
엘리바스의 말은 옳아 보이나,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오히려, 상처를 남긴다.
신학은 고통 앞에 멈춰야 하고, 신앙은 진실 앞에 눈 떠야 한다.
욥의 친구들은 신학을 가졌으되 신앙의 귀를 잃었고,
욥은 고통 속에서 신학을 잃었으나 신앙의 심장을 붙들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현실 속에서도,
신학과 신앙의 균형은 진리를 향한 길에서 가장 본질적인 물음이어야 할 것이다.
결국 엘리바스는 신학적으로는 ‘정답’을 말하지만 신앙적으로는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신학은 사람을 살려야 한다.
신학은 고통의 자리에서 울고 있는 이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의 언어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학’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폭력이다.
하나님은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고통당하는 이를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절말 중에 있는 이들의 항변과 탄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이 모든 흐름은 한 가지 물음으로 돌아온다.
‘신학은 정답을 위한 것인가, 진실을 위한 것인가?’
고통 앞에서 정답은 침묵하고, 진실은 말없이 울 수 있어야 한다.
욥기의 이 장면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의 신학은 한 사람의 고통 앞에서 멈출 수 있는가?
주:
[1] 틸리히의 신학 사상 전반을 담은 요약적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