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7장 - 세상의 어떤 어둠도 촛불 하나를 끌 수 없다
욥은 더 이상 친구들에게 기대지 않는다.
하늘을 향한 항변과 눈물도 지쳐간다.
그는 내면의 절망을 고백하며 이 장을 연다.
“내 정신이 나가고, 내 날들이 지워져 버렸다네.
무덤에 들어갈 일만 내게 남았다네.”(17:1)
욥은 말한다.
내가 받는 것은 비웃음밖에 없으며
친구들에게서 조차도 버려졌으며,
희망이라고 불리던 것들마저 죽음의 음지로 가라앉고 있다고.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입을 닫지 않는다.
“주님이 친히 나를 보증해 주십시오!
그 누가 나하고 마주 손뼉 치려고 하겠습니까?”(17:3)
이 말은 단순한 항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는 희망의 불씨를 보여주는 기도이다.
희망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해 다시 태어난다.
예수의 부활처럼,
욥의 희망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는 침묵의 희망이다.
희망의 신학은 낙관주의나 긍정적인 사고와 다르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현실의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눈을 드는 영혼의 자세이다.
부활은 죽음 이후에 오지만, 희망은 죽음과 함께 걷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살아남는 신앙’을 말하지 않고, ‘함께 견디는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다.
욥은 현실적 희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로 만드셨고,
사람들은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네.
속상함으로 내 눈이 어두워지고,
내 몸의 모든 부분이 그림자 같다네......
그러나 그대들은 모두 다시 오시게나!
그대들에게서는 지혜로운 사람을 내가 찾을 수 없다네.”(17:6,7,10)
그는 현실의 삶이 파괴된 상태에서, 더 이상 회복이나 형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나의 희망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의 희망을 누가 굽어살펴 주겠는가?
스올 문턱까지 희망이 같이 내려가겠는가?
우리가 함께 흙먼지 위로 가라앉겠는가?”(17:15–16)
하지만 이 말은 희망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묻는 말, 불가능 속에서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질문이다.
욥기 17장은 ‘희망이 죽었다’고 말하는 장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죽음을 끝까지 바라보며 말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은
희망의 진짜 정체를 드러낸다.
성 프란체스코에게 귀속되는 말로 전해지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모든 어둠 속에서도, 나는 작은 빛 하나를 향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어둠도 단 하나의 촛불을 끌 수 없다.”
“All the darkness in the world cannot extinguish the light of a single candle.”
욥의 말은 어둠의 깊이를 보여주지만,
그가 아직 입을 열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작은 빛’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다.
희망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신뢰다.
욥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말한다.
“주님이 친히 나를 보증해 주십시오!”(17:3)
그 신뢰가 불확실한 내일을 견디게 하는 영혼의 호흡이다.
희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내면의 힘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렇다.
욥의 희망은 회복이나 응답의 결과가 아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과 말하려는 존재로 남는다.
그것이 곧 신앙으로서의 희망이다.
욥은 희망이 죽었다고 말하지만, 말하는 순간 희망은 다시 살아난다.
그의 기도는 더 이상 확신이 아니라,
부재 속에서도 관계를 잃지 않으려는 기도의 형태로 이어진다.
희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낙관이 아니라, 잃을 줄 알면서도 붙드는 손이다.
욥은 그 손을 아직 놓지 않았다.
그는 희망이 무덤에 눕는다고 말하지만,
그 말을 남기는 자신의 존재는 ‘희망의 잔불’이 되고 있다.
희망은 완성이 아니라, 관계의 지속이다.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 걷고자 하는 마음이다.
희망이 신학자로 알려진 위르겐 몰트만( (Jürgen Moltmann, 1926–2023)은,
『희망의 신학 (Theology of Hope, 1964)』에서 이렇게 말한다.
“희망이 없으면 믿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희망은 믿음의 날숨이다.”
그렇다.
희망은 믿음의 날숨이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은 들숨이다.
그 사이에서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박노해 시인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라는 시에 이런 문장이 있다.
살아있는 인간은 날마다 무언가를 심고 씨 뿌려간다.
말의 씨앗인 말씨로도, 마음의 씨앗인 마음씨로도
세상 싶은 곳에 좋고 나쁜 씨앗을 심어간다.1)
그렇다.
씨앗을 뿌리는 인간은 희망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 희망만으로는 결실을 맺을 수 없다.
땅이 없이는 씨앗이 결실을 맺을 수 없듯이.
욥의 희망에 친구들의 정죄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이 봄비처럼 내릴 때,
욥은 끊임없이 희망의 날숨을 쉴 것이다.
주:
[1] 『하루』, 박노해, 느린걸음, 2019, p.44. ‘씨앗을 심는 사람’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