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벌레가 아니다

욥기 25장 - 모든 생명은 존엄하고 아름답다

by 김민수

빌닷은 마지막 발언을 내뱉는다.

그러나 그 말은 신을 앞세운 인간 경멸의 언어요, 인간존재에 대한 왜곡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울까?

여자가 낳은 사람 어찌 깨끗할까?

더구나 사람은 구더기라네.

인간은 벌레라네.”(25:4,6)

이 말은 신의 거룩함을 높이는 척하면서, 인간 존재를 모욕하는 말이다.
특히 여성에게서 태어난 자는 정결할 수 없다는 표현은

여성 자체를 부정한 존재로 보는 깊은 편견과 차별을 담고 있다.

여성신학은 이러한 언어 속에 스며든 가부장제의 억압 구조를 비판한다.

여성의 몸을 ‘불결함’의 근거로 삼아 인간의 불완전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역사적 왜곡이며 성차별의 신학화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남성에게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동등하게 깃들어 있으며,

이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예수의 복음 선포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27)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면,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마가복음 8:36)

빌닷의 말은 이러한 성서의 핵심 진리를 정면으로 배반한다.
빌닷의 신학은 '신을 말하면서 인간을 짓밟는 신학'이다.

빌닷은

“보게나!

그분 보시기엔 달도 밝은 것 아니요, 별도 깨끗한 것 아니라네.” (25:5)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찬란한 하나님을 말하면서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빚으신 인간을 '벌레', '지렁이'라 부른다.(25:6)

“더구나 사람은 구더기라네.

인간은 벌레라네.”(25:6)

이 말은 인간의 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다.
이것은 신학이라기보다 신의 이름을 빌린 혐오에 가깝다.
하나님을 높이려고

인간을 낮추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신학은 오만한 폭력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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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존재를 모욕하지 않는다.

성서를 통틀어 여성은 종종 침묵당하거나 주변화 된 존재로 그려진다.


욥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욥의 아내는 단 한 번 등장하고, 딸들은 말이 없다.

고통과 신앙의 중심 서사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약의 율법과 역사도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억압하는 구조를 반복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을 남성으로 부르는 언어,

‘하나님 아버지’, ‘그분(He)’이라는 명칭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포용성을 가리는 언어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성별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이사야서에는 하나님을 ‘해산하는 여인’(사 42:14), ‘젖 먹이는 여여인(사 49:15)’

‘자녀를 위로하는 어머니(사 66:13)’로 묘사한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을 독수리로 비유하며,

여성성과 어머니의 보호본능을 가진 하나님을 형상화 한다(신 32:11,12).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는 하나님을 ‘암탉’에 비유하며,

포용하고 보호라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한다.


여성신학자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 1932~)은 ‘엘 샷다이(El Shaddai)-전능하신 하나님’에서 ‘Shaddai’를 ‘젖가슴’으로 연결 지으며, 하나님의 양육적 속성을 강조한다.1)

신학자이며 시인은 잔 알드릿지 클랜턴(Jann Aldredge-Clanton, 1946~)은 ‘샷다이’를 ‘many-breasted one’으로 번역하며, 하나님을 ‘생명의 젖줄’로 이해한다. 이는 단순한 어근 해석을 넘어 하나님의 다산성, 보살핌, 생명의 근원성을 신학적으로 조명한 것이다.2)


이렇게 성차별적 신학 언어를 성찰하고 바꾸려는 노력은 신앙의 본질을 더 깊이 추구하는 일이다.

빌닷의 말을 통해서 여성에게서 난 존재는 정결할 수 없다는

성차별적이고 생명폄하적인 신학의 전형을 본다.

그러나 성경은

여성을 생명의 통로,

하나님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존재로 증언한다.

마리아를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한나와 마리아의 찬가는 역사의 반전을 노래한 예언의 목소리였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었다.

여성은 단지 생명을 잉태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역자로 등장한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존재로서의 여성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버금가는 위대한 행위를 하는 존귀한 존재다.

성서 속 여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존재이며,

억압의 질서를 전복하는 해방의 통로였다.


빌닷의 말은
거룩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듯하지만,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을 땅에 짓밟는 말이다.
그는 빛을 노래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진 인간을 부정하고, 특

히 여성을 저주하는 듯한 태도를 숨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높으시고,
인간은 티끌이지만, 그분은 티끌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벌레 같은 존재라고 낮출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품어야 한다.

빌닷의 말은
신을 찬양하면서 인간을 부정한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여인은 생명을 잉태하는 위대한 존재이다.
인간은 벌레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로 살아 있는 생명이다.

빌닷에게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지혜의 말을 전해 주고 싶다.


“그러므로 그대들 중 누군가가 넘어진다면 그것은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넘어지는 것이다. 걸려 넘어지는 돌이 거기에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

그렇다. 그는 또한 자기보다 앞서 가는 이들을 위해 넘어지는 것이다. 비록 빠르고 확실한 걸음으로 앞서 갈지라도 아직 그 돌을 치우지 않은 이들을 위해.” 3)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아니다.

여성은 남성만도 못한 존재가 아니다.

아니, 누구를 누구와 비교할 수 없다.

인간도, 벌레도,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다.


여성신학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정의란,

여성과 남성 모두가 각자의 경험과 몸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인간을 불결하다고 말하는 언어는 단지 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의 삶을 배제하고 침묵시키는 기능을 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당한 이들의 목소리 속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정의는 차별이 아니라 회복과 연대, 존중을 통해 드러난다.

여성은 생명의 통로이자 예언자이며 증언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주체적 존재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 저마다 아름답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선한 일이요, 생명을 죽이는 일은 악한 일인 이유다.


주:

[1] Phyllis Trible, 『God and the Rhetoric of Sexuality』, Fortress Press, 1978.

[2] Jann Aldredge-Clanton, 『In Whose Image? God and Gender』, Crossroad, 1990.

[3] 칼릴 지브란, 『예언자』, 무소의 뿔, 류시화 옮김, 2025,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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