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길을 맛이라도 보았는가?

욥기 26장-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모르는 것이다

by 김민수


욥은 다시 입을 연다.
짧고 찬란해 보이는 빌닷의 말은
빛이 아니라 허공을 가르는 어둠의 소리일 뿐이었다.


“그대가 힘없는 사람을 돕는다고?

맥없는 팔을 잡아 끌어준다고?”(26:2)


이것은 단순한 반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는 듯 행세하면서,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빌닷에 대한 고발이다.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빌닷이

고통의 정점에 서 있는 욥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일은

욥에게 더욱 더 큰 고통을 준다.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분에게로, 진영 밖으로 나갑시다.

그분이 받으셔야 했던 치욕을 우리도 짊어집시다.”(히브리서 13:13)


바울은 진영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진영 안과 밖의 경계는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셔야 했던 치욕이다.

진영 안에 있는 이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진 치욕을 짊어진 적이 없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의 복음의 진수를 이해할 수 없다.

오로지 진영 밖으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셔야 했던 치욕을 짊어지는 이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1)


오강남 교수는 종교를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표층종교는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의 형식과 제도, 교리와 전통, 조직과 의식에 집중하는 종교이다. 이 수준의 종교는 자신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며, 타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경쟁적인 태도를 갖기 쉽다. 정체성과 소속감을 제공하긴 하지만, 종종 우월의식과 종교 간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반면, 심층종교는 종교의 본래 목적과 존재의 깊은 차원을 향한 내면의 여정에 집중한다. 인간의 고통과 신비, 그리고 삶의 근원에 대한 성찰을 통해 사랑, 자비, 겸손, 연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 이런 종교는 자신만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타 종교 안에도 진실이 있음을 인정하고 대화와 상호 배움의 자세를 갖는다.
오 교수는 종교란 진리를 향한 길이지, 자신이 진리 그 자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참된 종교는 사람을 두렵게 하고 가두는 것이 아니라, 깨어나게 하고 자유롭게 하며, 더불어 살아가게 해야 한다. 결국 모든 종교는 저마다 다른 언어와 상징을 가지고 있지만, 그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본질, 하나의 신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일 수 있다.2)


혹시 나는 지금 빌닷처럼,

고통당한 이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정죄하지 않았는가?

진영 안에 머물며, 고통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에만 익숙하지 않은가?

빌닷은 타인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진영 안에서,

전통 신앙에 근거한 표층신앙으로 욥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욥은 빌닷에게 묻는다.


“그대 누구랑 이야기 나눈 것인가?

누구의 생각이 그대에게서 나온 것인가?”(26:4)


성령을 빙자한 말일지라도,
그 말이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건 헛된 말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많은 경우 진리의 표층, 겉모습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0:12)


그렇다.

항상 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신학이나 신앙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할 때에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욥은 이제 하나님의 위엄과 깊은 신비를 노래한다.
그 찬양은 교훈적 지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외와 겸손의 고백이다.


“그분이 물 위에 둥그렇게 금을 그으시네.

빛의 끝, 어둠과 닿는 곳에.

하늘 기둥들이 흔들리네.

그분의 꾸중에 놀란거지.

힘으로 바다를 휘저으시네.

익숙한 솜씨로 바다괴물을 부수시네.

바람을 보내 하늘을 말끔하게 하시고,

도망가는 뱀을 손으로 찌르셨네.”(26:10–13)


욥은 하나님께서

죽음의 깊이를 감찰하시고, 창조의 질서를 세우셨으며,

뇌우와 번개까지 지배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끝에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나!

이런 일은 그분의 길을 맛만 보는 정도야!”(26:14)


전도서 8장 17절은 말한다.


“그때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온갖 일을 보고 깨달았어요.

해 아래서 사람들이 하는 일을 사람은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요.

사람이 찾느라 수고하더라도 알아낼 수 없지요.

지혜로운 사람이 안다고 말하더라도 사실은 알아내지 못한 것이지요.”


고린도전서 8장 2절도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뭔가를 알았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그는 알아야 하는 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욥은 말한다.
빌닷의 말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말하지만, 그분의 깊이를 깨닫지 못한 말이다.

그 말은 오히려
지식의 교만과, 진실을 알지 못하는 공허한 신학이라고.

욥기 11장 7–8절에서 소발조차 말하지 않았는가?


“그대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샷다이(전능하신 분)의 완전함에 이을 수 있겠는가?

하늘처럼 높은데,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스올(죽은 사람들의 나라)보다 깊은데, 그대가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빌닷과 친구들은 그 깊음의 심연을 다 아는 듯 말한다.
욥은 그들에게 침묵과 경외의 태도를 되찾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욥은 빌닷의 짧은 말 뒤에
더 깊은 신앙과 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다 아는 듯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 알지 못해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태도다.


하나님을 말하는 자는

언제나 침묵의 끝에서 입을 열어야 한다.

욥은 침묵의 시간을 통과했다.

침묵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게 하는 보호막이었다.

그 침묵 끝에서 그는 다시 입을 연다.

그러나 이제는 말이 아니라 경외의 떨림이 흘러나온다.

그것이 지혜의 첫 언어다.

욥은 말한다.

우리가 들은 하나님의 소리는 속삭임일 뿐이라고.
진짜 능력의 우렛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다고.

지혜는 지식을 자랑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모른다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인간은 그 모든 것을 담을 수 없고 겨우 맛만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그를 경외하는 자가 진짜 지혜자다.

욥은 하나님의 질서와 조화, 창조의 힘 앞에서 침묵한다.

질서 있는 창조 세계는 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그 신비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고통 속에 있어도

‘모든 것을 아는 자가 아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아직 그분의 길을 맛만 보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입을 조심하고, 마음을 낮추며, 들리지 않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혜는 다 안다고 말하는 입이 아니라, 모른다고 고백하는 심장에서 시작된다.


주:

[1]Richard Rohr, 『Job and the Mystery of Suffering – Spiritual Reflection』,A Crossroad Book, 1996, p.131. “Incapacity to feed upon light”에서 발췌 요약함.

[2] 오강남 교수는 『예수는 없다』, 『종교, 심층을 보다』,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종교한 무엇인가』 등 다양한 저서를 통해서 ‘심층종교와 표층 종교’에 대한 담론을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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