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봄날 같은 겨울여행을 기대하면서 오랫동안 여행을 준비했다.
그런데 여행 일정을 조정할 수도 없는 시점에 동장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식은 하필이면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제주도에 내리자마자 눈보라와 칼바람이 "어서 오시라"고 마중을 나왔다.
지난해 3월 초, 제주도로 홀로 불편한 여행을 떠났었다.
배낭과 카메라 장비를 둘러매고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며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제주일주에 나섰다.
편안한 여행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택한 여행길이었는데, 여행기간 내내 칼바람이 불어와 몸을 지탱하고 서있기 조차 힘든 날씨들이 이어졌다.
여행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화창한 봄날이었으니 제주도를 떠나면서 "흥, 떠난다니까 서운하냐?"하며 매몰차게 돌아섰다.
그래서였을까?
마치 나와는 친하게 지낼 일이 없다는 듯이 눈보라가 휘날리고 칼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바다를 걷는 대신 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숲을 택했다.
사려니 숲, 신령한 숲이라는 뜻이다.
제주에서 살 적에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들던 곳이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많은 이들이 찾는 유명한 곳이 되었지만, 이전엔 그야말로 아는 사람들만 다니던 길이었다.
물찻오름과 이어지는(2018년까지 휴식년) 숲길, 그곳에서 수많은 야생화를 만났다.
숲은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려는 듯이 그동안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풍경을 선물처럼 내놓았다. 그날 나는 그 숲길로 들어가는 마지막 여행자였고, 해는 기웃거리며 지고 있었다.
왕복 9km는 짧은 거리는 아니다.
게다가 칼바람에 눈보라가 날리고 있다.
나무는 칼바람을 막아주는 대신에 성난 파도소리를 냈다.
나는 바닷속에 사는 작은 물고기가 된 것 같았고, 그 물고기는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듯했다.
반환점을 돌아 나오는 숲길은 깜깜했지만 다행히 쌓인 눈 때문에 길을 더듬어 나오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깊어질수록 나는 더 선명해졌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으며, 그간 쓸데없는 고민으로 번뇌하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느릿느릿 숲에 더 오래 머물고자 했고, 눈보라가 세차게 휘날릴수록 내 마음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리고 나는 토해냈다.
내 속에서 나를 짓누르는 것들을.
그리고 비로소 왜 사람들이 홀로 걸어봐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언제 가는 도반도 없이 홀로 걸어가야만 하는 길을 미리 경험하는 것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음날도 어김없이 칼바람이 불어왔다.
칼바람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곳 오름으로 향했다.
몸을 가누기 조차 힘든 날씨였지만 여행자들은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며 서로가 서로에게 따스한 눈인사를 나눈다.
"참 춥지요?
그래도 참 좋지요?
이렇게 차가운 바람 속에서 걷는 나와 당신 모두 근사하지 않아요?"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제주도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칼바람과 눈보라는 나를 따라다녔다.
지인은 내가 그들을 몰고 다녔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봄을 만나러 간 남도에서 나는 한 겨울 동장군을 만나고 왔다.
칼바람 속을 느릿느릿 걷고 돌아온 길, 나는 한층 더 강해져 있었고 내 삶을 힘겹게 하는 것들에 대한 오기는 더욱더 강해졌다.
"올 테면 와라!"
느릿느릿 걷는 이들은 빨리빨리 걷는 이들보다 많은 것을 본다.
단지 풍광만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던 자기의 속내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과 대면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당당해지는 것이다.
바람에 눕고 흔들리는 연약한 풀이지만 청춘의 푸름을 뒤로 한 지금도 여전히 바람과 맞서고 있다.
어느 인생이든 칼바람 같은 것들이 불어온다. 눈보라가 친다.
그러나, 그로 인해 움츠러들어 멈춰버린다면 어찌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사실 누구나 다 그렇지만,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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