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연약한 인간이 오늘날의 인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었던 시작은 '직립보행'에 있었다고 한다.
직립보행을 함으로 인해 손이 자유를 얻었고, 자유를 얻은 손은 도구를 만들었으며, 그 도구들은 인간의 한계를 하나 둘 극복하는 것들로 사용되었다.
물론, 과학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행복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걸음으로 인간이 되었다.
걷기'는 인간의 인간됨을 찾아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도보여행'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나를 발견하려면 나를 나 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비워내야만 투명한 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은 한때 제주를 삶의 근거지로 삼고 살아갈 때 가장 많이 찾던 곳이었다. 살던 곳과 가까운 이유도 있었지만, 걷기 편안한 오름과 부드러운 능선에서 바라보는 풍광들은 단 한 걸음과 약간의 시선만 바꿔도 전혀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숨 가쁘지 않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 그럼에도 저 바다 끝이 보이는 길, 문득 걷다 뒤돌아보면 내 걸어온 흔적이 아름다운 길, 계절따라 바람소리가 다른 길, 작은 들꽃들이 촘촘히 피어나는 길이 오름이다.
생각에 깊이 잠겨 걸을 때에는 오로지 생각의 감옥에 갇혀 주변 풍광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의 개입으로 '비우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갖 세속적인 번뇌들이 비워지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오름이다. 물론, 오름만이 정답은 아니다.
나는 종종 경험한다.
걷다 보면 어느새, 걸어온 시간만큼 나는 비워져 있었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번뇌는 떨쳐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떨쳐버리고자 하는 생각 조차도 잊는 것이다. 그 순간, 번뇌는 이미 번뇌가 아니라 놓아버려도 내 삶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사실,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된다.
사진을 담을 때 한 걸음의 의미와 한 뼘의 눈높이는 전혀 다른 느낌의 사진을 담게 한다.
때론 땅바닥에 엎드려야만 할 때도 있도 있고 까치발을 들어야 할 때도 있고 나무에 올라가야 할 때도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다.
도보여행은 비움의 여행이다. 그 까닭은 걸음으로 인간 본래의 본능에 충실할 수 있으며, 본능에 가까워질수록 직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직관적인 것들이 최고조에 이르면 아주 단순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진다. 단순해지면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 순간, 모든 세상의 멍에는 다 벗어던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기적 같은 것은 없지만, 그 정도의 문제는 극복할 수 있으며 사실은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도보여행의 매력이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온한 풍경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곳을 걸을 때에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넘어질 정도로 칼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러나 도보여행을 하기 힘든 상황들이 더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었을 때, 비로소 나는 걷기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도보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 나를 번뇌에 빠지게 했던 혹은 늘 내 머리에서 맴돌던 생각들을 하나 둘 끄집어내어 정리를 한다. 그러면 거짓말 같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힘들어했던 일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별 일도 아니었던 일들은 그냥 내려놓는다. 그것이 내 도보여행의 비움의 방식이다.
사실, 골목길을 위시해서 걷기에 좋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도보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그것도 아직은 칼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에 도보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제주도의 오름을 권하고 싶다.
368개나 되는 제주의 오름(2008년 오창명 박사는 제주의 오름이 450개가 넘는다고 학술서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368개 모두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듯 당신도 당신만의 매력이 있다.
도보여행을 통해서 당신만의 매력을 더 깊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직립보행을 통해서 인간이 인간이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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