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nalogu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수 Mar 03. 2016

바람꽃(Anemone) 예찬

#51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너도바람꽃


봄은 꽃과 함께 피어난다.

많은 꽃들은 봄이 오면 피어나지만, 선구자적인 꽃들은 피어남으로 봄을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선구자적인 꽃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연약한 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연약하지 않다.


홀아비바람꽃-양평에서


우리는 신의 얼굴을 어디에서 보는가?

이 질문은 "신은 어디에 현현하는가?"라는 질문일 수도 있다.

모세에게 현현한 광야의 신 야훼는 '떨기나무'로 오셨으며, 떨기나무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하찮은 나무였다. 그런데 신은 그 하찮은 나무로 오셔서 자신이 어떤 이들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준다.


꿩의바람꽃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피어난 뒤 꽃샘추위에 얼어 터지고 물러버리는 연약한 꽃인 바람꽃,

그들이 봄의 전령사가 된 것은 상징이다.

겨울을 물리치고 봄을 불러오는 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연약한 것들이라는 상징이다.

연약하지만, 끝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불러옴으로써 연약하지 않은 존재가 된 것이다.


태백바람꽃-가리왕산에서


바람꽃은 피어나 봄을 예찬하지만, 나는 찬란하게 피어난 바람꽃을 예찬한다.

꽃샘추위에 상처 입고 얼룩진 바람꽃은 더 아름답고, 길어야 보름 정도의 꽃을 피우기 위해 일 년 중 345일을 준비하는 그들의 성실함은 거룩하다.


만주바람꽃-남한산성에서


사람들의 무자비한 손길만 닿지 않으면 그들은 해마다 그 자리에서 피어난다.

물론, 사람의 손길이 무자비한 것만은 아니기에 예전보다 거리는 멀어졌지만 여전히 그들은 봄이면 피어난다.

그들이 피어날 수 없는 세상, 그들이 피어나도 눈 맞춤할 수 없는 세상은 삭막한 세상이다.

봄에 피어나는 생명의 신비를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삶은 참으로 불행한 삶이다.


회리바람꽃 - 화야산에서


이미 피어난 바람꽃도 있고 피어날 바람꽃도 있다.

그들은 저마다 피어나는 순서가 있으며, 그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피어난다는 것, 그것 또한 내가 그들을 예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피어나는 것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피어난 것들도 서둘러 자리를 비켜준다.


바람꽃-덴마크 숲에서 만난 꽃
노랑바람꽃-덴마크 숲에서 만난 바람꽃


연록의 빛깔이 점점 짙어지던 그 어느 날, 우리보다는 조금 계절이 늦은, 그래서 막 봄이 시작된 덴마크의 어느 숲 속에 섰다.

그곳에도 우리네와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다지 다르지도 않은 바람꽃이 무리 지어 피어있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든 바람꽃임이 고마웠고,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게 해줘서 고마웠다.

세바람꽃 -한라산에서


아네모네(Anemone)는 그들의 속명이다.

그들의 꽃말은 '허무한 사랑', 짧은 삶에 대한 아쉬움을 품은 꽃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피어남이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피어남은 허무하지 않고 오히려 거룩하다.  

꽃말을 바꿀 수 있다면 나는 '거룩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붙여주고 싶다.


변산바람꽃 -한라산에서


그들은 아무 곳에서나 피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피어날 수 있는 곳에 무리 지어 피어난다.

작고 연약한 꽃들의 특징이기도 하며,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더불어 함께,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며 예찬받아야 마땅한 일인가!


숲바람꽃-태백에서


들바람꽃


위에서 담은 몇몇 바람꽃은 이제 그곳을 찾아도 볼 수 없다.

수천수만 년 간 그곳에서 늘 그렇게 봄을 준비하던 그들이었지만, 동계올림픽이라는 인간의 축제 앞에서 그들은 강제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또 피어날 것이다.

사람들과 조금 더 먼 거리에서, 눈에 뜨이지 않게, 봄이면 또 피어날 것이다.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팽나무와 어머니의 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