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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May 19. 2016

옥바라지 골목을 추억하다

#옥바라지 골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저 무덤덤하다

옥바라짓골목에 있던 양주이발관


지난해 7월, 뜨거운 햇살이 옥바라지 골목길을 뜨겁게 달구던 날이었다.

머지않아 개발이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고, 이제 그리 멀지 않아 옥바라지 골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서둘러 온 길이었다.


대한민국의 개발방식은 참으로 무지막지하고 미개스럽다.


깡그리 없애고 새로 짓는 방식만을 고수한다. 이런 불안한 예감은 일 년이 되기도 전에 현실이 되었다. 

여관 골목에 마지막 남은 '부림장'을 허는 과정에서 이곳을 방문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불호령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고는 있지만, 결국에는 '복구도 할 수 없는데 그냥 개발해야지 어쩌겠나?'하며 개발은 이어질 것이다. 다행스러우면서도 너무 늦은 뒷북에 서글프다.


옥바라지 골목(2015년 7월)


옥바라지 골목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갇힌 바 된 분들의 옥바라지를 하는 이들의 거처였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역사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골목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홀대당하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오히려 득세하는 세상은 독립운동의 상징성을 간직하고 있는 이런 골목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여느 판자촌이나 달동네와 다르지 않은 길을 옥바라지 골목도 강요당했다.

그곳을 지키려는 이들의 움직임은 있었으나 미미했고, 거대한 자본권력의 횡포 앞에서 무력했다. 


우리에게는 옛것을 보존하면서 현재를 접목시키는 방식의 개발이 없다. 그런 방식의 개발은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고, 잉여도 적기 때문에 개발업자들이 회피하는 방식이다. 자본의 시대의 불행은 이런 사고방식으로부터 온다.


결국, 값을 매길 수 없는 존귀한 존재인 인간에게도 값을 매겨버린 것이 자본의 횡포다. 이미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 있다. 값을 매기고, 등수를 매기고, 숫자로 서열화하는 것을 당연스럽게 여기고 거기에서 뒤쳐질까 노심초사 그들의 노예가 되어 우리의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골목에서 사라진 것은 이런 풍경만이 아니다.

골목에서 사라진 것들을 대신해서 채워질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온통 탐욕 덩어리 자본의 논리일 터이다. 그곳에서 무엇을 더 볼 것이 있으며, 담을 것이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원했다.

저울질을 하며 어떤 것이 나에게 가장 이익일까 생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애당초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성이나 상징성 같은 것은 생각에도 없었다. 자본의 끊임없는 공격에 스스로 그런 생각을 내려놓았을 수도 있다. 결국, '더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포위하듯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골리앗 같은 아파트들과 얼키설키 얽힌 실타래처럼 꼬여버린 전선줄, 그들의 아픔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죄를 씻어주겠다는 듯 거만하게 서있는 듯한 십자가, 차라리 영혼을 씻느니 몸이나 씻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항변하는 듯한 목욕탕 굴뚝....


이 모든 것들이 옥바라지 골목의 적나라한 현실이었으나, 지금은 다 사라져 버렸다.


과연, 

서울시장이 그곳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

폐허가 된 그곳을 이제야 지킨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무지막지한 개발방식에 익숙한 토건세력들이 그냥 물러설 것인지?


수많은 질문들 앞에서 나는 혼동스럽다.

단지,

무지막지하고 미개스러운 개발방식을 한탄할 뿐이다.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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