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무심한 것이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라는 듯 우리는 무심함에 익숙하다.
저녁 늦은 시간에 60대는 되었음직한 취객이 막다른 골목길에서 주행하던 내 차를 막고 행패를 부린다.
대꾸할 가치가 없어 기다리지만, 그 행패는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112에 전화를 한다. 내가 아니라 그가... 차라리 편했다.
경찰이 왔다.
이 동네에서 유명한 사람이란다. 그렇겠지......
어쩌면 거리에서 만난 그들을 향한 마음도 그런 느낌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나는 정말 그들에게 어떤 애정 어린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심하다.
다들 까닭이 있고 사연이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지 않아 안도하는 우리들은 어쩌면 그들과의 경쟁에서 조금 앞섰을 뿐인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공장을 하는 친구에게서 늦은 밤 전화가 왔다.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야, 그나저나 이 나이에 돈 벌려고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는 것도 힘들다."
푸념이었다.
"나도 그래."
그 한 마디에 서로가 서로에게 안쓰러움을 느끼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위로를 받는다.
그러니까 친구겠지.
가장 낮은 걸음으로 걸어야 하는 그만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 꿈꿔도 이루지 못할 꿈- 두 발로 걷는 꿈을 현실로 살아가는 이들도 그에 못지않은 치열함으로 살아갈 것이다.
누구나 흔들리며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담긴 사진들 조차도 차라리 흔들려서 초상권 이내 뭐니 하는 조아림을 떨쳐버릴 수 있으니 그 흔들림이 차라리 리 고마운 것 일는지도 모르겠다.
선명하게 칼 초점으로 이 모습을 담았더라면, 현실로 재현된 죽음의 시간이 너무 생생해서 그냥 눈을 돌려버렸을는지도 모르겠다.
흔들린 사진의 묘미가 있는 것처럼, 흔들리는 삶의 묘미도 있는 법이리라.
죽은 문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의 섬뜩한 구호가 흔들리는 거리를 유혹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들은 비록 죽은 문자에 사로잡혀 살아가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문자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명동은 낯선 이방인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나는 낯선 이국의 거리에 서 있던 그 어떤 날과는 전혀 다른 불콰한 이질감을 느끼며 그곳을 걸어야만 했다.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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