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했으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당신은 이 사진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나는 대성유리 수족관이라는 간판 아래의 가게를 이 사진의 중요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유리가게도 아니고 수족관도 아닌듯한 잡화점, 그러나 문이 열려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영업 중이라는 표식이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잡화점, 수많은 가게들이 개업과 폐업을 반복하고, 개업할 때의 꿈을 접어야만 하는 아픔들을 감내하는 동안에도 이 잡화점은 근근하게 버티고 있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더군다나 이 골목만 벗어나면 현대식 대형매장들이 그득하고, 그들은 대량 판매라는 것을 무기로 할인율로 손님을 유혹한다. 그러나 잡화점은 편의성과 물건의 다양성뿐 아니라 가격 경쟁면에서도 모두 뒤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살아있다. 그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당신은 이 사진에서 또 무엇을 보는가?
가장 눈에 띄는 피사체는 고양이일 것이다. 다 불타버린 폐가 지붕을 걷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 사실은 그를 보는 순간을 찰나의 순간이라 여기고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돌아와 한참 그 사진을 바라본다. 주요 피사체가 아닌 다른 것들, 우연히 사진 안에 들어왔던 것과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고양이 귀를 맴돌고 있는 잠자리 한 마리, 그것이야말로 고양이의 출현보다 더 우연한 찰나의 순간이 아니런가?
게다가 다 타버린 폐가에도 뭔가 지킬 것이 있어 비닐과 장판으로 덮어놓은 물건들이 있다. 과연 불타버린 폐가에서 차마 버리지 못한 물건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면서 다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 사진에서 당신은 또 무엇을 보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가격표를 본다. 애호박이 1개에 1,000원이며, 국산 생강 반군에 4,000원이라는 가격표를 본다. 저 가격에 팔아 이문은 얼마를 남기는 것일까? 종일 불티나게 팔린다고 했을 때에 과연 얼마를 벌 수 있는 것일까?
억 단위의 비자금과 부정한 돈들과 횡재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한 푼 두 푼 모아 살아가는 삶은 고단하지만, 그 고단한 삶이야말로 진솔한 삶이요, 소박한 삶이 아니겠는가?
고희를 바라보는 아저씨가 돋보기 너머로 버섯을 봉지에 정성껏 담는다. 저 버섯은 얼마라는 가격표를 갖게 될 것인가? 그것 역시도 천 단위를 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며, 먹을거리를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너무 싸다. 그에 비해 오히려 우리를 소유해 버리는 소유물들은 얼마나 비싼가?
과연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프레임 속의 프레임을 담았다.
흐릿하지만 난 여전히 궁금하다. '동주'라고 가늠할 수 있는 저 낙서는 분명 사람 이름일 터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었을까? 분명 잘려버린 담장에는 흔적으로 미뤄보아 '동주'와의 사랑이 이뤄지길 바라는 이의 이름도 함께 쓰여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남았다면, 남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남자의 이름이었다면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이 사진에서 무엇을 보는가?
이 사진을 찍고 나서 확인을 하면서도 나는 이 사진 속에 숨어있는 가장 매력적인 장면을 한동안 보지 못했었다.
그것은 바로 우측 하단에 붉은 재킷을 입고 독서를 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를 본 순간, 그를 담고 싶었으나 셔터 소리로 그의 독서를 방해할 것 같아서 그냥 지나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를 인식하기 전, 나는 그 사진을 찍었고, 그녀와 더 가까운 곳에 갔을 때에는 담고 싶었으나 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그 지나쳤던 아쉬움이 한편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순간은 단 한 번의 순간뿐인데, 왜 그렇게 주저주저했던 것일까?
이 사진은 보면서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단지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너무 확신하고, 우리의 생각을 너무 확신한다.
다 보았다고 착각하고, 보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한다. 과연,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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