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에게 군대란 그게 좋든 싫든 잊을 수 없는 공간이 되기 마련이죠. 전역한지 근 15년이 다 되었지만 그 2년여라는 시간동안 있었던 일 중 아직도 또렷하게 남은 기억이 몇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군부대에 방문했던 여대생 이야기를 이곳에 쓰기도했죠.
이번 글은 별 재미도 없고 큰 감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저에게는 나름 특별한 기억이기에 써봅니다.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저는 경기도 모 경계부대에 자대배치를 받게됩니다. 306보충대를 지나 구불거리는 길을 잡은지 이틀 정도. 사단배속 전 보충중대라는 곳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죠.
당시 제가 배치받을 자대가 모두 결정된줄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단내 정확히 어디로 배치받을지는 보충중대에서 결정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네요.
gop부대였다보니 그 보충중대에서 대기하던 이등병들은 다들 그쪽으로는 안갔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보충중대서 같이 대기하던 인원은 열다섯정도.
와중에도 계속 자대배치결정은 이루어져서 보충중대 첫날이 다 가기도 전에 10명은 본격적인 자대생활을 위해 군용트럭들을 타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첫날에도 배치결정을 받지 못하고 최후까지 남은 인원은 저포함 5명이었던거죠. 이게 겪어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굉장히 초조했습니다. 마치 어린시절 친구들은 하나 둘 걸상 집어넣고 하교하는데, 나만 나머지공부에 남겨진 기분이라 해야하나요.
도대체 어디로 배치되려고 아직까지 결정이 안된건가...이런 생각들이 저와 남은 이등병아저씨들을 걱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그곳 보충중대장님께 그래서 물어봤더랬습니다. 왜 저희는 늦어집니까라는.
중대장이 웃으면서 그냥 그렇게 얘기하시더군요. 자대는 하루라도 더 늦게 가는게 이득이니 너무 초조해할필요없다라고요.
별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군부대는 대부분 산속에 있다보니 해가 굉장히 일찍 집니다. 오후5시가 좀 넘었나싶었는데 사방은 삽시간에 새캄해지더군요. 밤이된다해서 무서울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습니다만, 앞길이 막막한 인간에겐 그 사소한 어둠도 좀 우울했습니다.
담배 피러갈때마다 담배 좀 펴도 되겠습니까라고 기간병들에게 물어봐야했는데 흡연하는 최후의 5인 중 둘은 그 귀찮음도 무릅쓰고 연신 담배를 피우러 나갔더랬죠.
보충중대에 같이 들어온 장정이 열다섯 이었는데 밤까지 남은 건 다섯뿐이었으니 나름 우리 다섯끼리는 이런저런 통성명을 하게됩니다.
저보다 한두살많은 형도 있었고 입대일자가 한달이상 빠른 사람도 있더군요. 후반기교육을 받고오다보니 그렇게 되는거죠.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부대 앞 낙엽을 쓰는 일에 투입되었을 때는 문득 그런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냥 이곳에서 2년 군생활하는 것도 나쁘지않겠다.
쨍하게 밝아진 햇볕아래서 보니 보충중대는 그리 험악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중대장도 호쾌한면모가 보이는 쾌남이었고 거기 기간병들도 까탈스러워 보이지 않았거든요.
점심을 먹고난 뒤에도 우리를 데리러오는 군용차나 연락이 없어 다른 아저씨들과 이참에 눌러앉는것도 괜찮겠다는 농담에 서로 웃기도하고 그랬습니다.
오후4시쯤. 오늘 하루도 여기서 지내나보다라는 생각이 굳어갈무렵. 중대장님이 저희를 불러서 더플백을 챙기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드디어 자대배치 결정이 난것이죠.
두돈반이라는 차량은 그렇게 늦은오후 보충중대의 구불길을 덜컹거리며 들어왔습니다. 신병들을 자대로 뿌릴 역할을 부여받은 장교가 중대장님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저흰 신속하게 두돈반 트럭위로 올라탔죠. 중대장은 2년 금방간다. 다치지말고 무사히 전역해라라는 덕담을 남기고 멀어졌습니다.
두돈반의 뒷좌석은 승차감이 형편없습니다. 덜컹덜컹대는 수준이 경운기랑 다를바가 없다라는.. 쓰잘데기없는 생각들이 이어지는 와중 어느 한지점에서 갑자기 트럭이 멈췄습니다. 그곳에서 두명의 보충중대동기 2명이 내렸죠. 딱 하루를 같이 보낸 사람들이었지만 최후의5인이어서 그랬던건지. 아니면 먼 길 막막한 이등병들의 감성이라는게 그랬던건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두 아저씨들은 트럭안에 남은 저희 셋에게 모두 화이팅합시다 한마디하고 멀어졌습니다.
이미 경기도 끝쪽인데 어디까지 가는건가라는 생각이 들무렵 또 한번 차가 멈춥니다. 인솔장교의 호명과 함께 또 한명이 화이팅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멀어졌죠.
이제 남은건 저와 저보다 2살 많았던 동기아저씨 뿐이었습니다. 말수가 적던 사람이었습니다. 보충중대에서도 말하는 것을 많이 못봤거든요. 근데 그형이 둘만 남으니까 그런얘길 하더군요.
사람이 하루만에도 정이 든다고요. 딱 하루만 봤을 뿐이고 또 앞으로는 볼 일이 거의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상황이 이렇게되니 정이 든다는 말을 하면서 웃었습니다. 공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도 5명이 하나하나 줄어갈때마다 트럭안의 공허함이 그렇게 아쉬웠으니까요.
그리고 또 한곳에서 트럭이 멈췄습니다. 제가 아니라 그 무뚝뚝하던 아저씨 차례였네요. 내리기전 슬쩍 주먹을 내밀더니 그러더군요.
보충중대에서 같이 하루를 보낸 우리xx부대원들은 모두 건강하길 바랍니다. 화이팅.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읊조리듯 말을 내뱉은 아저씨가 더플백을 들고 내렸습니다.
'몌별하다'라는 말이 있죠. 섭섭하게 헤어진다, 소매를 잡고 헤어진다는 뜻으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말입니다. 단 하루, 짧은시간 피어난 전우애가 우리 모두를 몌별하게 만들더군요.
우리 다섯 병사는 단 하루라는 시간이 엮어준 인연으로 그렇게 트럭 안에서 헤어졌습니다.
최후의 1인이 된 저는.
땅거미가 지고 밖으로 내다보는 길이 어두워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커질대로 커지고 나서야 자대에 도착합니다.
저까지 내리고 난 뒤 잠깐 뒤돌아본 두돈반트럭의 텅빈공간이.. 저게 저렇게 넓은 곳이었나 라는 생각을 했었네요. 오래전인데도 캄캄한 배경과 삭막하게 넓어보이던 그 공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어제 정말 오랜만에 군대꿈을 꿨습니다
갑자기 행보관님에게 전화가 와서 너 전역처리 안됐으니까 복귀하라는 말. 복귀 후 이 추운날 야외에서 걸레를 빨던 순간이 되어서야 꿈에서 깼는데
찬바람 맞고나니 저 날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