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가는 마지막 날에 대한 소회

by 강다로


벌써 2025년 한해의 마지막 날이네요. 일년의 끝 날. 옛날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존재했을, 어떤 감상에 대한 옛사람의 질문을 잠시 빌립니다.

'섣달 그믐밤이 서글픈 까닭은 무엇인가. 그대들의 생각이 듣고싶다'

이른바 책문입니다. 조선 15대 왕 광해는 과거시험 합격자들을 모아놓고 물었다고합니다.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임금조차 한해가 가기전 마지막 날 그 쓸쓸함과 서글픔을 느꼈다는 것이 새삼스럽기도합니다. 다소 서정적인 질문이기도 하네요.

섣달 그믐밤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밤을 뜻합니다.

이 책문을 처음 들었을때,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루하루가 다 똑같은 날일인데, 왜 유독 한해의 마지막날이 더 서글픈 감상이 일어날까.

어린시절엔 그저 또래 사촌들 만나서 밤새놀고 떠들던 시간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꼭 그렇진 않았던거같습니다. 새해를 앞둔 날 밤중에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던,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날의 한밤이 나이들수록 더 안타까움을 저도 체감하고있습니다.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죠.

후회는 하지않는 것이 상책이라 말하지만 후회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싶습니다. 동서양가릴것없이 지나온 길 뒤를 돌아보지말라는 설화가 있는것을 보면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 회한과 미련을 떨쳐내지 못했던것이겠죠.

후회가 남는 이유야 무궁무진할겁니다. 저만해도 아쉬운 것들 투성이군요. 도무지 개선의 여지조차 보이지않는 고질들은 해결이 되긴하는건지 요원하기만 합니다. 차라리 오늘 지는 해가 내 남은 아쉬움과 게으름을 모조리 쓸어가고, 내일 뜨는 해는 말 그대로 새로운 인간의 현신을 담보한다면 그믐밤이 덜 서글플 수도 있겠단 어처구니없는 생각도듭니다.

문득 밤하늘의 보름달을 보면 슬퍼진다던 인생선배들의 말이 나이를 좀 더 먹은 지금에서야 새롭습니다. 만월은 빈 곳없이 꽉찬 휘광을 자랑하지만 그 시간은 짧습니다. 어떻게보면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는것이죠. 지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 사람의 인생 어느 지점과 좀 닮지않았나. 그렇네요.

정작 휘영청 둥근 달은 점차적으로 줄어가는 자신의 빛무리를 아쉬워하지 않을텐데, 오로지 인간만이 달의 차고 기우는 섭리에 의미를 부여할뿐입니다.

인생이란것도 결국 채우고 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싶습니다. 광해가 섣달그믐이 서글픈 이유를 물었지만, 정작 본인도 그 이유를 모르고 한 질문은 아닐거란 소감입니다.

이루지못한 소망엔 아쉬움이 남는법이고 사람은 뒤를 돌아볼 때 성취한 것은 쉽게 잊어버리곤합니다. 대신 오늘처럼 한해가 끝나는 날 밤에 이루지못한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짙어지죠. 되돌릴 수 없는것들에 대한 회한을, 무정하게 지나가는 세월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니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야 내가 알바 아니라는 태도는 시간이 지닌 거역할 수 없는 힘입니다. 이른바 시간은 집행통보만 하는 판관인 셈이죠. 그 무정함에 사람은 정리를 부여하니 유독 마지막 날 밤이 아쉬운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릴때는 내가 시간을 잡아당겨가면서 자란거 같은데, 어느시점을 지나면서부터는 시간이 내 멱살을 잡아쥐고 끌고 가는 것같습니다. 내가 시간을 보내야하는데 시간이 나를 보내는 느낌이라 해야할까요.

어쨌든 내 맘대로 되는것이 많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새해에는 이루어질지말지 모르는 소망을 다시 담아보아야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새해에는 이루는 것이 더 많길바랍니다.

p.s. 덧없이 빠른 세월에 대한, 제가 아는 몇 안 되는 시 중 하나입니다. 송나라 대유였던 주자의 권학시입니다.

소년이 늙기는 쉬우나 뜻 이루기는 어렵도다.
한치의 짧은 시간도 가벼히 여기지말라.
연못가 봄풀은 여직 봄 꿈에서 깨지못했는데
섬돌 앞 오동 잎은 벌써 가을소리를 내느니라

소년이로 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 不可輕)
미각지당 춘초몽(未覺池塘 春草夢)
계전오엽 이추성(階前梧葉 已秋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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