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I. 깨닫는다는 것 2 아뜨만 Atman 我我 我
아뜨만이란, 앞글에서 말씀드린 브라흐만과 같은 궁극의 실재, 본질인데, 브라흐만이 우주 차원에서 삼라만상을 만들어내는 근원이라면, 아뜨만은 개체로서의 인간의 근원입니다. 브라흐만을 그대로 옮길만한 한자어 개념이 없어서 범(梵)이라는 글자로 음차하였듯이 아뜨만도 똑같이 ‘아’(我)로 음차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음차가 오해를 불러일으켜, 아뜨만이 ‘我’ 즉 ‘나’인 것으로 오해하곤 하지요. 영어의 I나 ego로서의 ‘나’가 아니고 우주가 아닌 개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진아眞我’라 의역하기도 하는데, 그것도 여전히 아뜨만을 ‘나’와 관련지으면서 오해하게 만듭니다. 동학에서 인내천, 이라 하는데, 이를 원용해 생각하면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늘이 사람이듯이 브라흐만이 곧 아뜨만이라는 거지요. 이 범아일여를 수행자들은 산스끄리뜨어로 ‘따뜨 뜨왐 아시(Tat Tvam Asi)’ 라고 하는데, 그것(즉 브라흐만)은 곧 너(즉 아뜨만)이다, 라는 의미지요. 인간이 우주와 같다, 우주가 인간 안에 들어 있다는 경지를 깨달으라는 거지요. 현대 양자물리학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부분이 전체를 담고 있다는 식과 비슷하지요. 작은 부분이 전체 우주와 연결된다는, 부분 속에 전체가 반영된다는 차원으로 범아일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조금은 나을 듯합니다.
브라흐만과 마찬가지로 아뜨만도 우화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시죠. 어느 날,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누구는 브라만 계급이라고 하고 누구는 농부의 아들이라고 하고, 누구는 전사라고 말합니다. 스승은 말없이 코코넛을 하나 가져와 깨뜨렸습니다. 이 단단한 껍질은 너희가 생각하는 신분이나 이름 혹은 몸과 같다. 하지만 그 안의 순수한 하얀 과육과 맑은 물은 그럼, 무엇이냐? 그것이 너희의 진정한 아뜨만이다. 코코넛이 어디에서 자랐건, 그 본질은 모두 같은 코코넛이듯, 서로 다른 인간은 모두 다 같은 본질의 아뜨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브라흐만이 아뜨만과 같은 것이라는 걸 설명하는 우화를 같이 한 번 들어보실까요. 파도와 바다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파도가 바다를 향해 말했습니다. 나는 작고 약하며, 언젠가는 사라질 거야. 나는 무력한 존재야. 그러자 바다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너는 나, 즉, 바다의 일부란다. 지금 그 파도라는 건, 단지 한순간의 형상일 뿐, 네 본질은 나와 다르지 않단다, 라고 말했답니다. 파도는 개체 존재 아뜨만이고, 바다는 우주 존재 브라흐만이니, 인간 안에 우주가 들어 있고, 인간이야말로 우주적 존재라는 세계관이지요.
원래 범아일여 사상은 사회적 평등 사상과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개체 인간의 존재 안에 동일한 우주적 본질인 브라만이 존재한다는 인식이니 얼마나 평등한 사상을 뒷받침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실제 역사는 달랐습니다. 우빠니샤드 철학은 사회 구조 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데다가 역으로 브라만 계급이 자신들의 최고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브라만 계급이야말로 브라흐만이 사회적 계급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식으로 왜곡하여 카스트의 불평등성을 강화했지요. 그래서 결국, 붓다는 아뜨만이라는 건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카스트 체계를 비판한 겁니다. 철학이 사회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사회를 바꾸는 건 물질이고, 그렇게 바뀐 사회는 철학으로 정당화할 뿐이지요.
범아일여 사상은 인도의 문학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 가운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시가 있습니다. 그의 [기탄잘리] 60번 시를 읽어보면, 타고르는 범아일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 (전략)
아이들은 세계의 바닷가에서 놀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영하는 법도,
그물을 던지는 법도 모른다.
진주를 캐는 이들이 바다에 잠수하고,
상인들은 배를 타고 항해하지만,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아
다시 흩날리듯 흩어 버린다.
그들은 숨겨진 보물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던지는 법을 모릅니다.
... (중략)
삶의 밀물과 썰물,
그 흐름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미래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놀이 속에서 그들은 외칩니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만납니다.
타고르는 브라흐만을 끝없는 바닷가로 보는데, 이는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 브라흐만이 펼쳐 놓은 무한한 우주의 장(場)인 거지요. 바닷가에 노는 아이는 세속의 지식이나 집착에서 벗어난 순수한 존재, 개체로서의 아뜨만을 상징하는 것이고요. 그 순수한 존재란 진지하게 물고기를 잡으려 하지도 않고, 진주를 찾지도 않으면서 단지 모래성을 허물면서 노는 즉, 아무런 목적이나 의도에 집착이 없는 존재이지요. 아이들이 바다와 하나가 되는 모습은, 바로 브라흐만에 하나가 되는 아뜨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