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I. 깨닫는다는 것 1. 브라흐만 Brahman 梵
제I장에서 힌두교의 시간관을 중심으로 그들의 세계관을 살펴보았습니다. 끝이 없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만물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고 무한한 절대 실재의 존재가 있으니, 그것을 브라흐만이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브라흐만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제약받지 않으니 모든 우주를 초월한 그 무엇이겠지요. 브라흐만이 무엇인가는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브라흐만은 그 자체가 설명 불가의 존재니까요. 그러니 그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힌두교 신학의 궁극입니다. 이 브라흐만이라는 존재를 궁극으로 본 우빠니샤드의 여러 철학자들도 그랬습니다. 이를 사람들에게 설명은 해야겠는데, 그 자체가 설명 불가한 것이라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었겠지요. 이런 경우 인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비유로 설명을 시도하지요. 그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깨달아보라는 겁니다. 그러니 먼저, 브라흐만이 무엇인지, 그들이 했던 비유 이야기를 몇 개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선인 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영겁을 거쳐 살아온 사람으로 세계의 생성과 파괴를 본 사람인데, 그가 우주적 명상을 하던 중 영겁의 시간 속에서 세계를 파괴하는 홍수가 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홍수로 세계가 모두 물에 잠기니, 하늘, 땅, 산, 별, 심지어 신들도 모두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는 끝없는 바다를 홀로 떠다니다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연꽃 위에 누운 아기 비슈누를 목격하지요. 비슈누는 엄청난 빛을 내뿜으며 손가락을 입에 문 채 평화롭게 잠들어 있습니다. 그가 그 모습에 경외심을 갖고 아기 비슈누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그 아기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거대한 우주를 보지요. 하늘, 땅, 태양, 달, 별과 은하수, 산, 강, 바다, 숲, 신들과 인간, 모든 동물과 식물 등 그 거대한 윤회의 존재들을 보지요. 그는 충격과 감동에 휩싸인 채 다시 아기 입 밖으로 나오니, 아기는 미소를 지으며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 모든 존재의 내면에 존재하는 본질인 브라흐만을 보았고 그것이 곧 비슈누 신으로 인해 존재하니, 비슈누는 마야를 초월한 절대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브라흐만이 절대 본질인데, 그것이 곧 절대 신, 비슈누라는 거지요.
좀 더 쉽게 만들어진 우화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어느 브라만 가문의 총명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버지이자 스승인 사람이 있었답니다. 아들은 열두 살이 되면서 베다 학습을 받기 시작해 스물네 살이 되면서 모든 지식을 다 습득했답니다. 12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가 자기 지식에 기고만장하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기를, 그 지식으로 너는 모든 존재의 본질을 알게 되었느냐? 그 하나를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되는 그것을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니 아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하는 말이 진정한 앎이란 단순한 외적 지식이 아니라, 우주의 근원 즉 브라흐만을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브라흐만이란, 진흙을 알면, 진흙으로 만든 모든 그릇을 알 수 있다, 굳이 모든 그릇을 일일이 다 알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또 다른 비유를 듭니다. 소금을 물에 타서 하루 동안 두게 하고, 다음 날 물을 맛보게 하지요. 소금을 보지 못했지만, 물은 어디를 맛보아도 짜다. 이 소금이 브라흐만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아버지는 또 다른 비유로 씨앗과 열매의 관계를 들어 브라흐만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무 열매의 가장 작은 씨앗을 쪼개보아라. 그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보이지 않는 것에서, 거대한 나무가 자란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근원에서 나온다. 그것이 브라흐만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제게는 손주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나이로 아홉 먹은 여자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제가 사는 부산 집에 내려와서 며칠을 놀다 갔습니다. 어느 날, 할아비랑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해서 한 캔버스에 둘이 같이 그렸습니다. 그냥 붓 가는 대로 그리고서 정리를 하려고 하니, 하늘도 보이고, 바닷속 풍경도 보이고, 큰 독수리도 날고, 돌고래도 유유히 헤엄쳐 다니고, 알라딘의 마술 램프도 있고, 세 잎 클로버도 있습니다. 감옥도 있고, 악어도 나타납디다. 이런 풍경을 일부러 그리려면, 제 실력으로는 불가합니다. 그림이라는 게 보이는 것을 모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자기 나름의 느낌이나 인식에 따라 해석하는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람 안에 있는 어떤 모양이 무엇이든,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니, 고정된 실재가 아니고 변화하는 이미지일 뿐이지요. 그러나 변하지 않는 건 분명히 저 그림 안에 있습니다. 손주를 사랑하는 할아비의 마음이겠지요. 그건, 이 그림에서는 어떤 특정한 이미지로 재현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니 색도 없고 형상도 없고, 그러니 예술도 아니고 작품도 아니지만,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어떤 변하지 않는 본질, 드러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힌두 최고의 궁극적 존재 브라흐만Brahman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 그림을 브라흐만의 이미지로 삼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