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I. 깨닫는다는 것 3. 네띠 네띠 neti neti


우빠니샤드의 철학자들은 우주의 절대 본질인 브라흐만 그리고 그것이 인간 개체의 본질이 되는 아뜨만은 그 성격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브라흐만-아뜨만을 설명할 때, ‘네띠 네띠’라는 어구를 사용했습니다. 우빠니샤드에 나오는 한 예를 보면서 그들의 세계관을 탐구해 보겠습니다. 문장은 이렇습니다. “네띠 네띠 나 히 에따스마드 이띠 나 에따스마드 이띠(neti neti, na hi etasmād iti, na etasmād it).” ‘네띠’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의 산스끄리뜨 어휘고, 이띠iti는 ‘이것’이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니다, 실로 이것으로부터, 라고 할 수 없다, 이것으로부터라고 할 수 없다.”이죠. 브라만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저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 라는 뜻입니다. 브라만과 아뜨만은 규정 불가의 본질임을 드러내는데, 부정의 방식으로 뜻을 전하는 규정하는 겁니다. 브라흐만과 아뜨만은 어떠한 속성이나 개념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임을 의미하면서 누구도 답을 내릴 수 있으니, 명상이나 요가 혹은 기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개인이 탐구해서 찾아보라는 의미지요. 정해진 답이란 없으니, 그것을 따르려 하지 말고, 나름대로 그 답을 찾아보라는 이치입니다. 요즘 말하는 인문학적 탐구 방법론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노자가 도를 설명할 때 사용했던 문장,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와 비슷한 개념이어서 어느 정도는 익숙한 정의 방식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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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네띠 네띠’의 방식을 전하는 우빠니샤드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살펴볼까요? 어느 선인이 담론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어느 여성 선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이 세계는 무엇에 의해 유지되는가? 그 선인이 대답합니다. 세계는 물에 의해 유지되고, 물은 공기에 의해 유지되며, 공기는 하늘에 의해 유지되고, 하늘은 세계법에 의해 유지되고, 그 세계법은 브라흐만에 의해 유지됩니다, 라고 대답하지요. 그러면서 바로 이어, 그 브라흐만을 설명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존재로 인해 보는 자가 보고, 듣는 자가 듣고 생각하는 자가 생각한다.” 결국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존재인데, 그 어떤 방식으로도 그 성격을 한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거지요.


부정의 방식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태도는 애매하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지요. 무엇인가로 긍정적인 방식으로 고정하여 규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넓고 융통성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A는 B다라고 하면 B 이외의 것은, A가 될 수 없기에, 배제의 대상이 되지만, A는 B가 아니고 C도 아니라고 하면, B와 C를 제외하는 모든 것이, A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대체로 이런 부정의 방식에 따른 담론은 정체성의 해체 혹은 확장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는 포스트모던 세계관을 통해 이러한 현상을 문화적으로 접하게 되었지만, 인도에서는 이미 고대 때부터 인도 사회 문화에 크게 자리 잡았던 것이지요. 예컨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육체는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생각도 아닌 것으로, 하나씩 제거하며 그 성격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이렇게 열린 정체성에 대한 사고가 활성화되면, 담론과 토론이 크게 발전합니다. 그러니, 답을 정해 놓고 따라가는 종교의 방식이 아닌, 그 안에서 모든 방식이 가능한 것으로 열어두는 그리고 그 서로 다른 것들이, 공존하는 종교와 문화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종교를 하나의 진리를 향한 여러 길로 이해하고, 그 위에서 인도의 종교는 절대적 지혜로서가 아닌, 상대적 방편으로서 자리 잡았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세상 밖으로 나가 수행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모두 공존하는 세계가 되는 거지요. 어떤 도그마가 압도하는 주류를 이루지 않는 세계지요.


이러한 태도는 현대에 들어와 인도의 정치에도 잘 반영됩니다. 네루가 1947년 독립 후 국가 건설 시기에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어느 쪽에도 끼지 않는, 즉 진영을 쌓아 상대를 적으로 취급하는 태도를 부정하고 이쪽과도 잘 지내고 저쪽과도 잘 지내는 국제 정치를 취한 것도, 이러한 세계관의 소산이고, 국내적으로도 연방제를 도입하고 의원내각제를 통해 다양한 정치 세력과 공존하는 모델을 만든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였습니다. 그렇지만, 공존과 통합이 사회에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대체로 사회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사회악이라는 개념을 불분명하고 애매하게 규정하는 경향이 세고, 그 안에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합리화하는 경향이 강하지요. 그러면서 체념과 순종의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아 사회적 약자의 사회적 처지가 개선된다거나 그에 대한 불만이 쌓여 폭발하고 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하게 싸워 어떤 사회 정의를 세우려는 힘이 약한 게 태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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