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I. 깨닫는다는 것 4. 디야나 Dhyana 禪


힌두 신화를 보면 여러 악신이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강력한 악신은 [라마야나]에 나오는 악마 라와나(Ravana)일 겁니다. 라와나는 머리가 아홉 달린 신인데, 애초에는 독실한 브라만 가문의 바른 수행자였지요. 그는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 신 쉬바를 부지런히 모시면서 충만한 지혜를 얻고자 밤낮없이 명상에 들어갑니다. 그 명상을 우리 말로 선(禪)이라 하는데, 뜻이 없는 한자어지요. 산스끄리뜨 디야나(dhyana)를 한자어로 마땅히 뜻을 옮길만한 게 없어서 그냥 음차하여 선이라 한 것이지요. 중국어로 읽으면 ‘디야나’의 음가에 더 비슷하게 읽힐 것인데, 우리는 우리말로 읽으니 ‘선’이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 한자어를 자기식으로 읽는데, ‘젠’ 비슷하게 읽고, 그게 영어로 고유명사 비슷하게 되어 Zen이라 널리 알려진 겁니다. ‘선’이라 하면 그 뜻이 얼른 들어오지 않으니, 그 앞에 ‘참’이라는 글자를 넣어 참선이라고도 하고 ‘정’(定)이라는 글자와 함께 쓰이면서 ‘선정’이라 하기도 합니다. 라와나는 이 선을 오랫동안, 아주 진지하고 헌신적으로 수행했는데, 자기 머리를 하나씩 하나씩 잘라 쉬바에게 바쳤답니다. 그리고 마지막 머리를 자르기 직전, 쉬바가 나타나, 너의 갸륵함을 잘 알겠으니 그만하라고 했고, 세계 모두를 차지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축복으로 부여했습니다. 물론 그 뒤, 그는 자기 능력을 함부로 쓰면서 결국 라마에게 파멸당합니다. [라마야나] 이야기는 앞으로도 자주 말씀드릴 겁니다.


선 또한 많은 세계관의 개념이 그랬듯이 힌두교에서 나와, 이후 불교에서 조금씩 달라진 개념입니다. 선에 관해 불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건, 뭐니 뭐니 해도, 싯다르타가 수행하여 붓다 즉 깨달은 자가 된 이야기일 겁니다. 시다르타는 오랫동안 여러 방편으로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했지요. 극단적 고행이나 금욕이나 쾌락의 방식 등 모든 걸 다 해봤으나 그런 것을 통해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깊은 명상에 들었는데, 그가 행한 깊은 명상, 그것이 디야나입니다. 당시 힌두교의 베다 경전이 제시하는 제사 중심의 물질적 종교 행위를 비판하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우빠니샤드의 수행자들이 택한 방편이지요. 선정 중에 그는 마라Mara –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룹니다. -로부터 두려움, 욕망, 의심 등의 유혹을 받았으나, 흔들리지 않고 선정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지요.


그 ‘선’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면 사물이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보통 우리가 아는 건 ‘선문답’이라 하는 개념을 통해서 넌지시 감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일 겁니다. 붓다의 제자 중 한 사람, 우리에게는 마하가섭으로 잘 알려진 마하까시야빠Mahakashyapa가 바로 이 선정 통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어느 날, 붓다가 여러 제자 앞에서 꽃을 하나 들었지요, 그러자 대부분은 의아해했지만, 마하까시야빠만 말없이 미소로 응답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염화시중’이지요. 지혜란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선은 언어를 넘어선다는 그래서 그 경지를 중국 사람들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표현한 겁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개념은 문자 즉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체험해서 터득한 깨달음을 중시하는 것으로, 신을 믿고 구원이나 물질적 축복을 받는 종교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요. 중심의 선(禪)의 핵심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선정이라는 게 불교가 추구하는 여러 방편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보는 하나의 종파가 동아시아에서는 선종(禪宗)이고 그렇지 않고, 불교를 논서의 교리를 체계적 이해로 접근하려는 즉 수행보다는 논리적 이해를 중시하는 종파가 교종이 되지요. 불교는 이 두 가지 전통이 섞여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더 정통인지 따지고 분별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길에서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를 선종과 교종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그건 속세를 떠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승려들의 문제의식일 뿐, 세속에 남아 종교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두 길 모두 갈 수 없었지요. 그들이 가는 길은 신을 믿고, 복을 받아 잘 살고, 죽은 뒤 극락으로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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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끄리뜨어 dhyana는 ‘깊이 생각하다’는 뜻이sl, ‘선’의 핵심은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생각에 빠지거나, 흐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오로지 자신이 든 ‘화두’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거지요. 이걸 힌두교의 브라흐만에 대한 이해에서 다루었듯, 그 전통의 연장선에서 볼 때, 말로서 설명하거나 형언할 수 없다는 거지요. 전형적인 힌두교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니 결국 불교에서의 선은 힌두교에서의 절대 존재 브라흐만-아뜨만의 합일을 깨닫는 것을 목표하 하는 것이 될 테고, 나중에 그 브라흐만이라는 게 다름 아닌 쉬바나 비슈누와 같은 절대 신이라면 그 신과 합일하는 즉 그 신에게 모든 걸 다 바치는 게 되는 방편이 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에서 말하는 선을 깨닫는 게 부처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힌두교와 불교에서 널리 받아들이는 해석과 변화의 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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