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I. 깨닫는다는 것 5. 삼매 Samadhi


앞서 말씀드린, 디야나와 비슷한 어휘로 사마디samadhi라는 게 있어요. 디야나를 뜻으로 번역할 마땅한 말이 한문에 없어 ‘선禪’이라고 음차하였다 말씀드렸는데, ‘사마디’ 또한 마찬가지로 마땅한 뜻 번역어가 없어서, ‘三昧’라고 음차하여 씁니다. 그러니 그 삼매가 무슨 셋 어쩌고의 의미가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요. 산스끄리뜨 어휘에서 ‘모은다’는 의미의 ‘sam’일 뿐이지요. 우리가 흔히 독서 삼매경, 노름 삼매경에 빠졌다, 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모든 걸 완전히 집중하여 다른 곳으로 흩어지지 않는 일념(一念)의 상태에 몰입된 것을 의미하지요. 요새 말로 하면 일본어에서 온 ‘오타쿠’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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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야나나 사마디는 모두 수행하는 사람이 마음을 감각의 외부 세계로부터 떼어내 내면에만 집중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디야나는 대체로 숙고나 관조와 같은 명상의 과정을 의미하고 그를 통해 도달한 합일의 상태, 즉 명상에서 정점의 결과를 사마디라 하지요. 힌두교와 불교에서 그 위치가 조금은 다르지만, 대체로 디야나가 완성된 상태를 사마디라 합니다. 붓다가 니르와나nirvana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길 즉 팔정도를 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 여덟 가지의 길 가운데 마지막 단계인 정정(正定)이 바로 사마디 즉 삼매입니다. 이 상태는 자아와 대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의식도 초월한 상태라 하는데, 저같이 속세에서 이론으로 공부하고 가르칠 뿐 그 경지를 체득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단계지요. 어떤 비유를 보니, 디야나는 호수에 집중하여 물결이 잦아들고 고용해지기를 기다리는 과정이고, 사마디는 그 호수가 완전히 잔잔해져 거울처럼 고요한 완전한 내면 상태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렴풋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사마디를 좀 더 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힌두 신화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힌두교에서 절대 본질은 브라흐만이지만, 그것은 절대 신 비슈누이기도 하고, 쉬바이기도 하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그 절대 신성과 하나 되는 깊은 명상을 하는 건 힌두교에서 수행자들이 하는 매우 중요한 행위입니다. 수도 없이 많은 신화 속 이야기에 선인, 현자, 요가 수행자, 세상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기세자(棄世者)들이 사마디 경지에 이르고, 그로써 물질계를 초월하여 해탈에 이르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런 수행자들 가운데, 힌두교 최고 경전 [라마야나]를 쓴 이는 발미끼(Valmiki)라는 반인반선(半人半仙)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가 역사 속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신화 속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에 의하면, 발미끼는 원래 산적이었는데, 어느 날, 성자 나라다Narada가 그에게 ‘라마’라는 이름을 염송하면서 명상하면 까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그는 그렇게 명상에 잠긴 후 오랜 세월 동안 사마디 상태에 있었으니, 그의 몸 위로 개미굴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사마디에서 깨어난 후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으며, 이후 [라마야나]를 저술한 시성 발미끼가 되었지요. 이 이야기는 사마디를 하면, 인간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영적 각성을 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 이야기를 보면, 사마디는 꼭 속세를 떠나야만 이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붓다 같은 이는 속세를 떠나서 이루었지만, 이야기 속의 어떤 왕은 호화로운 궁정에서 지내면서도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었지요. 서로 다른 두 방편 중 어느 하나가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거지요. 물론 촉에는 전자가 옳은 방편이었지만, 후대에 가면서 후자도 또 하나의 방편으로 확장된 겁니다. 김성동이 쓴 소설 [만다라]를 보면 이런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말, 한국 사회에 큰 문제를 제기한 이 소설은 지산과 법운이라는 두 승려가 겪는 서로 다른 수행의 방편을 그린 겁니다. 소설가는 속세에서 여자와 몸을 섞고 술 담배에 빠지면서도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고, 속세를 떠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한 채 어떤 화두를 붙들고 깨달음을 추구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데, 당시 한국 불교계 일부에서는 이런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도에서 나온,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어떤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 라는 너무나 자명한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분법으로만 이해하려고 한 거지요. 그래서 당시 불교계 일부에서 이 소설이 불교를 모독하고 욕보였다고 작가를 비난하면서 상당한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한국의 불교계가 얼마나 한심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지금의 한국 불교계가 당시보다 이러한 불이(不二)의 세계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세계관을 더 잘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면, 한 발짝 더 들어가볼까요? 사마디가 세상 속에서나 그 밖에서나 가능하다면, 사마디를 이루는 것이나 이루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뭘까요? 답은, 없습니다. 그 차이가 있다는 사람은 어떤 깨달음의 단계가 사마디라 할 것이지만, 차이가 없다는 사람은 그 깨달음이라는 게 다름 아닌 깨닫지 않음과 다르지 않으니, 사마디는 몸 섞어 가면서 돈 벌고 사는 세상 그 자체다, 라고 말하겠지요. 제 그림은 전자의 상태를 묘사하지만, 제가 전자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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