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
II. 깨닫는다는 것 7. 따빠스 Tapas 고행
어느 문화권이든 고행이라는 게 있습니다. 모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거지요. 인도에서는 사회가 너무 심하게 계급화되고, 종교가 너무 형식에 얽매이거나 제사장이 일방적으로 너무 많은 물질을 그러모으고 그 와중에 생산일을 하는 보통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착취당하는 역사적 현상에 대한 지식인 계층의 반성 차원에서 발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류 종교인 힌두교가 브라만 제사장이 주장하는 의례 중심의 세계관에 반발하여 진리는 의례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다고 설파한 거지요. 기독교에서도 이러한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으니 아시는 바와 같이, 구약에서는 제사를 신앙의 중심에 두었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믿음 즉 순종을 더 중요한 가치로 두었지요. 인도에서도 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 기독교에서처럼 순종 즉 정해진 진리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최고 가치가 되는 게 아니고, 진리는 열려 있으니 누구든 물질 세상을 버리고 사회 밖으로 나가 고행을 수행하면서 찾으라는 거지요. 신이든 하늘이든 조물주든 그에 의해 주어진 진리의 내용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세상을 부인하는 행위에 중점을 두는 겁니다. 이렇게 세상일을 극복해야 할 욕(慾)으로 보면서 그것을 부인하는 고행을 따빠스tapas라고 합니다.
따빠스는 어원적으로 ‘열’ 혹은 ‘열기’를 의미합니다. 내면의 열기 혹은 에네르기로 세상일의 욕망을 불태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행(asceticism)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 욕을 다 불태우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는데, 그게 정신적으로만 하는 게 아니고 육체적 고행을 통해서도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육체적 고행을 수행해야 정신적으로 정화 단계에 들어가고 이내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본 거지요. 그런데 모든 수행자가 다 그렇게 육체적 고행을 한 건 아니고, 붓다 같은 사람은 그거 해보니, 그렇게 해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인식하고 육체적으로 고행하지 않고 중도의 길 즉 세상일과 고행 사이에서 정신적으로 찾는 길을 택합니다. 붓다는 따빠스 즉 고행을 부인하였으니, 세상 밖에서 자신만의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지만, 다른 힌두교 성자들은 따빠스를 통해 힌두 사회의 병폐를 고치는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즉, 따빠스를 수행하면, 세상의 악을 초월한다는 거지요. 그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무래도 극심한 카스트 차별을 극복하는 것이겠지요.
힌두 신화 여러 곳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들어보시지요. 주인공은 힌두 신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전설적인 왕 비슈와미뜨라Vishvamitra입니다. 그는 원래 끄샤뜨리야 출신이었는데, 브라만 성자가 되기를 갈망했고, 이를 위해 독한 고행에 들어갔지요. 그러자 브라만 계급에서 큰 반대가 있었지만, 그의 고행에 감복한 신이 브라만이면서 동시에 선인(仙人)의 지위를 부여해주지요. 카스트를 바꿀 수 있는데, 그게 고행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거지요.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이미 고행을 수행해서 어떤 경지에 오르면 더 이상 카스트는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할 텐데, 선인의 경지에 이르러서까지 출신이 브라만 카스트가 되어야 한다니, 그 카스트의 벽이 얼마나 강고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요. 이와 비슷하게 현실 속에서는 될 수 없는 것을, 고행을 통해 이루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신화 속 어떤 왕은 육신을 지닌 채로 천상에 오르고 싶어 했지요. 신들은 안 된다며, 거부했지만, 왕은 따빠스를 수행해 그 영적 힘으로 천상에 올라갔습니다.
고행을 수행하면 그 어떤 일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는 비단 낮은 카스트가 아니더라도 심지어는 악마에게도 똑같이 해당합니다. 힌두 신화에는 여러 종류의 악마가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히란야까시야빠Hiranyakashyapa라는 왕은 우주의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며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힘을 얻으려고 수천 년 동안 고행을 한 후 브라흐마 신에게 그 보답을 완전히 받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이든 짐승이든 누구도 해칠 수 없다는 영원 불사의 힘을 받으나, 그 힘을 믿고 진리를 어기는 데 사용하다가 결국 비슈누가 사람 절반 짐승 절반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죽여버립니다. 따빠스라는 게 최종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 경지에 이르면 힌두 세계관이 설정해놓은 사회 질서에 따르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거지요. 종교 행위가 현실이 고통을 타파하지 못하고, 일종의 피난처 역할을 한 좋은 예지요. 이러한 메시지는 숱하게 많은 버전의 이야기로 바뀌어 고대 이후 지금까지 흘러 흘러 전해지지요.
따빠스는 세상의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세계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힌두 사회가 따빠스를 추구하는 사회라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지요. 세상일을 멀리하고 정신적인 수행을 하는 사람과 함께 여전히 세상일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는 게 옳습니다. 종교에 입각한 세계관은 실재의 반영이 아닌,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이데올로기는 시간이 가면서 낡고, 헤지고, 바뀌지요. 세상이 변함에 따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