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밤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 시퍼런 저녁의 색은 밤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령이다. 눈으로는 확인을 할 수 없는 저 색조가 이미지로 나오리라는 기대쯤은 하고 셔터를 눌렀다. 저 밤으로 가는 색조는 그걸 막아 선 듯 보색이 되는 저 노란 듯 붉은 불과 함께여서 마음을 더욱 흔들었다. 보색은 변증법이다. 대립을 안으로 품어 새로움을 만드는 변증법 말이다. 불, 그것은 죽음을 딛고 일어나는 소생에 대한 기원이고, 저녁은 죽음을 향해 가는 처연함이다. 이 둘이, 보통 인도 하면 떠오르는 갠지스 강 중류 쉬바 신의 도시 바라나시varanasi에서 내 눈으로 만났다. 죽음과 생명이 갈등하지 않고 새로운 하나로 경계를 여는 신, 그 우주의 주 쉬바로부터 비롯된 신화의 도시 바라나시에서 그 변증법을 본다.
오래 전 이곳을 찾을 때 저 거대한 뿌자puja 예배는 드리지 않았다. 그냥 각자하거나 조용히 사원에서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게 10여 년 전부터 밖으로 나와 특설 무대에서 하는 공연으로 바뀌었다. 큰 규모로 무대를 만들고, 젊고 잘 생기고 피부가 하얀 청년들을 세제로 뽑아 예배 봉헌 일을 하도록 훈련시켜 세계 도처에서 오는 '고객'들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한다. 신앙은 쇼가 되어버렸고, 봉헌을 받는 대상은 강가 신에서 '고객'으로 바뀌어버렸다. 그것이 숭고함이든 아니든, 어리석은 종교심이든 아니든, 어쨌든 장사하는 수단이 아니었던 그 때 그 수수했던 개인들의 예배가 더 나아 보인다. 비단 그 때가 흘러간 과거여서 그런 것만은 아니리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주위를 산보하고 있을 때 누군가 불을 만들고 있었다. 특설 무대에서 행해지는 그 예배에 쓰고자 준비하는 불이다.
불은 이미 상품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미끼 상품. 그 상품이 된 불을 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면서 뒤에 있는 사람 손에 든 불이 앞 사람의 얼굴과 평면적 차원에서 겹쳐질 때를 기다렸다. 때가 되니, 불은 사진을 찍으려는 자의 의도대로 앞 사람의 얼굴을 태워버리듯 다가온다. 이윽고 불로 지진 얼굴에서 시꺼먼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입체인 실제 공간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두 개의 장면이 평면 공간으로 오면서 보이는 현상이다. 입체를 평면으로 바꾸는 공간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 수 있는 표현 방식,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순간, 사진에서 나머지 물성은 굳이 신경 쓸 일이 없다. 이 둘의 교차만 있으면 된다. 불에 초점만 맞추고 나머지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차라리 나머지 물성이 투박하고, 뭔가 부족하고, 아쉬워야 사진가가 하고 싶은 저 얼굴을 지져 버린 불의 속성이 더 살아난다고 계산을 했다. 그것이 아름다움이자 나의 메시지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은 감각을 다루되, 그 바탕은 지혜 추구에 둔다. 미학이되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아름다움이란 사유, 해석, 재현, 시선 등과 관련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냥 절대적으로 순수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행위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영역의 요소들을 거세한 채 홀로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라는 말로 퉁 치면서 말들을 하곤 하는데, 그 고정된 범주의 아름다움은 내가 보고자 하는 이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내가 카메라로 담은 이 불은 이미 일반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그 불이 아니다. 이 불은 이 사진이 보여주지 않는 상품화 된 예배를 품는 불이다. 보이지 않되, 보여주는 것, 그것은 사진이 갖는 표현의 가장 중요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이 불이 '일반적으로' 볼 때 아름답든 아름답지 않든 이 사진을 찍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삶의 숭고함은 표현보다 침묵에 있다. 말하고자 하고, 내뱉고 싶은 것을 눈앞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드러낸다. 그 포기 안에 재현할 수 없는 어떤 전율이 드러난다. 이를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지, 처연함이라 할 수 있을지, 숭고의 미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삶은 직접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술이든 삶이든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이 ‘일반’이라는 이름의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할 때 나오는 전율은 숭고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기본’이든 도덕이든 예의든 간에 그에 의심하고, 저항하면서 피곤하게 사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 숭고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고개 숙이지 않고, 탈주하는 것이다.
귀뚜라미
나희덕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토하는 울음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