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긷는 인문 11

by 이광수

인도에서 유학하던 때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를 처음 접하고 전율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포스트 식민에 이어 포스트 모던을 접하던 90년대 초 나의 세계관은 근대주의에서 포스트주의로 거의 자리 이동을 하였다. 그런데 그 이동이 선을 긋고 월경하듯 이쪽과 저쪽이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포스트모던이 이질적이고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세계를 주장하지만 내가 보기에 세계 안에는 그러한 것들과 다른 포스트 이전의 모더니티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았다. 세계를 보는 눈이 도대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흘러왔다. 아니, 여전히 그 상태에 있다. 그렇게 혼돈 속에서 인문학을 한 세월이 3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부끄럽다.


세계란 그것을 좌지우지하며 만드는 위인이 존재하지 않고, 이야기란 지은 사람이 없으니 듣거나 퍼트리는 사람이 모두 지은이며, 주인공이란 우리가 익히 아는 꼭 그런 사람만인 것은 아니다. 앞과 뒤가 바뀌어도 얼마든지 새로운 것이 될 수도 있고,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져 섞여버린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세상이다. 결과가 원인이 되고, 과거가 미래로 가고 오기를 반복하듯 하다. 현대인은 모두 천편일률적이라지만, 사실 각각은 모두 다르다. 그 안에 존재하는 차이란 보기에 따라 천양지차일 수도 있지만, 눈곱만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모든 것은 보는 것과 그것을 재현하는 것의 문제다. 뭔가 포스트적인 것으로 판단되어 자세히 들여다 보면 꼭 그러한 것만도 아니니, 그 안에 뭔가 모던한 분명한 어떤 것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TV 안에 TV가 있는데, 그 안에서 또 TV를 보는 게 또 TV 안에서의 일이다. 도대체가 모던인지 포스트 모던인지, 세계를 판단하는 것에 종잡을 수가 없다. 매일의 일상이 그렇다.


10년 넘게 품고 있는 생각이다. 세계는 분명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인가? 영원불변하고 항상성이 있는 어떤 실체를 갖는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로고스라는 말씀이 있고, 이데아라는 이상이 있는 것인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은 시공의 맥락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가? 아니면, 매일 변해 가는 세계를 과연 덧없는 것, 아침 이슬과 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고 치부하는가?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거울에 들어 있는 빛에 의해 비친 상이 덧없는 것임을 알지만, 이미 그 덧없는 것이 새로운 본질을 생성해내는 이 무서운 현실을 언제까지 허탄한 이미지일 뿐인 것이니 무시해야 한다고 살 수 있는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중2 학생이 죽어 묻어줄 때 핸드폰을 함께 묻어달라고 하는 그 핸드폰은 본질이 아니고, 어머니가 본질이라고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물에 빠트린 물독을 보면서 물독 속에 물이 있는 건지, 물속에 물독이 있는 건지를 당신은 분별할 수 있는가? 혹시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은 그때 어디선가에서 흘러 변화하여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 그것이 목화토금수든, 지수화풍이든 뭐든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하고 또 변화하여 임시적인 어떤 실체로 있다가 다시 또 변화하여 알 수 없는 저 세계로 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세계를 사진으로 말하고 싶다.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한 번도 버리지 않고 품고 있는 생각이다. 내 손으로 직접 개입하지 않은 채 대상이 제공하는 여러 요소들을 선택하여 그 이질적이고 명료하지 않은 세계를 말하고 싶다.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대상이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싶다. 그것이 진리든 아니든 관계없다. 그것이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다. 난, 적어도 어쩌다 한 번 씩 드러난 그 독립적이지 못하고 명징하지 못한 그 세계와 그런 사람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를 위해 난, 무엇을 재현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사진을 표현하는 여러 방식 가운데 내가 가장 주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빛이 만들어낸 흐름을 재현하는 것이다. 빛이 단절되어 장면이 선으로 끊어지지 않고, 그 사이에 어중간 하고, 양다리를 걸치는 그림자 같은 것이 중층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잡는 것이다. 라자스탄 사막에서 돌아 온 후 나무 밑에 앉은 두 중년의 사내가 눈에 띤 건 필연이었다. 나는 사진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나무나 발코니 혹은 빨래 널어놓은 것을 보면 자동으로 그 주변에 만들어진 그림자와 그늘을 보곤 한다. 그 안에서 나는 바위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낙락장송이 아닌, 가는 듯 서는 듯, 땅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하며 물같이 흐르는 장면들을 보려 한다. 사진에서 장면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생성되기 때문이다.


사진은 말을 하지 않으므로 그런 사진을 보면 누구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연작으로 가는 것이다. 인상파가 잇달아 그려내는 그 빛과 점으로 만들어내는 그 연작의 세계 말이다. 내가 보는 게 작은 좁쌀일지라도 그것은 분명한 하나의 세계일 텐데, 그것을 어떻게 하나의 본질로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런 영원성, 항상성의 본질적 세계관을 따르지 않는다. 세계는 내가 내가 아니고, 네가 네가 아니면서 흘러간다. 물 흐르듯. 그 세계를 끊을 수 있는 건 없다.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속이려는 인간과 속는 인간들만 그렇게 하려 할 뿐.


볼 수 있는 것의 깊은 비가시성이 보는 자의 비가시성과 관련되어 있다.

미셸 푸코 《말과 사물》

11.JPG 인도, 라자스탄 자이살메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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