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I. 깨닫는다는 것 11. 구나guna 속성
힌두 철학의 어떤 학파 사람들은 인간에게는 세 가지 구나guna 즉 속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따마스tamas라는 것인데, 무기력함이나, 어두움 혹은 악의 속성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라자스rajas라는 것인데, 활발함이나 열정적인 것으로, 진취적인 속성을 말하는 겁니다. ‘깨달음’에 대해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전체 열한 개의 글과 그림 가운데 마지막 차례입니다. 인간의 속성에 관한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글과 그림입니다. 깨달으면, 사람이 과연 바뀔 수 있느냐, 즉, 사람의 본질적 속성은 뭐냐, 라는 문제부터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서는 사뜨와satva라는 게 있는데, 진리 즉 깨달음의 속성을 말합니다. 각각 검정, 빨강 그리고 하양으로 비유되곤 하지요. 이원론 학파에서는 따마스를 맨 아래에 두고 열심히 수양하면, 다음 단계인 라자스로 더 열심히 수행하면 진리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바뀐다는 거지요. 그런데 힌두교 다수를 차지하는 일원론 학파에서는 그 셋은 각각이 존재하는 것이라 셋을 서로 따로 구별할 수 없다, 즉, 하나를 극복하고 그 위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이지요. 어느 견해가 옳은 건지, 저 같은 범인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인간이 과연 깨달았다 해서, 그 본성이 바뀔까, 라는 의문을 가질 뿐이고, 그래서 저는 후자 쪽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지요.
힌두 신화 이야기를 통해 한 번 생각해 보실까요? 힌두교 최고의 경전 [마하바라따]는 전쟁을 소재로 삼아 이야기로 전하는 힌두교 세계관의 전시장입니다. 많은 장수가 나와 서로 싸우는데, 절대신 비슈누가 끄리슈나Krishna라는 화신으로 나타나 아르주나Arjuna가 대표 장수인 쪽을 지지하고 이끌어줘 그쪽이 이긴다는 게 이야기 줄거리지요. 아르주나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저쪽 대표 장수가 까르나Karna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 둘을 한 번 비교해보시지요. 두 사람 모두 전사의 속성 즉 라자스가 강한 인물이지만, 아르주나는 싸움터에서 늘 보편적 도리와 정의 즉 다르마를 고민합니다. 개체의 속성과 보편적 속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지요. 반면에 까르나는 명예, 충성심, 복수심 등 라자스의 열정과 야망으로 점철된 인물입니다. 아르주나는 전쟁 중에도 자신의 친족을 죽이는 것에, 고민하며 주(Lord) 끄리슈나에게 왜 이런 짓을 해야만 하느냐고 묻지요, 그리고 그에 대한 끄리슈나의 가르침이 나오는데, 이게 힌두교 최고의 경전, [바가와드 기따]입니다. 끄리슈나는, 네가 담당해야 할 의무는 전사로서 싸우는 것이니, 그것이 너의 속성이다, 하지만, 진정한 자는 그 속성을 초월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속성에 따라 그 성품이나 행동이 정해지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보편적 도리, 법도를 행하려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달리, 사회사적으로 분석하자면, 인도 고대 사회에서 인간은 자기에게 정해진 속성에 따라 카스트가 정해지니, 그것에 저항하지 말되, 그렇게만 살지 말고, 더 큰 사회 공동체가 정한 법도가 있는데, 그것이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속성에 반하거나 모순되게 살라고 요구하면, 그 법도를 따라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모든 가치관은 브라흐만과 아뜨만이 같은 것 즉 범아일여 사상에서 말하듯, 인간과 우주 즉 개인과 사회의 조화라는 거지요. 그 조화라는 건, 사회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쪽으로 행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테고요. 결국, ‘구나’ 즉 본질적 속성에 관한 힌두 신학의 궁극은 사회 질서의 유지고, 그 안에서 브라만이 최고의 위치를 구가하는 것이지요.
비슷한 맥락으로 불교의 측면에서 한 번 살펴볼까요? 저 유명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에 관한 겁니다. 돈오(頓悟)는 직관적인 깨달음인데, 그것을 이루면 그 후 수행도 이루어진 것이냐, 아니면 이루었더라도 계속해서 수행해야 하느냐의 문제지요. 불이(不二) 일원론의 관점에서 보면, 깨달았다 할지라도, 속성은 여전히 남아 있고,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므로, 점진적으로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원론의 입장으로 보면, 속성은 극복되어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깨달음이니, 그 즉시 수행도 완수된다는 것이지요. 이 논쟁은 고려 시대 불교에서 선종과 교종의 관계 설정에 관한 문제가 되는데, 선종 즉 깨달음이 절대적인지 아니면 교학 공부도 중요한지의 문제입니다. 출가 승려들만의 문제인 것, 같지만, 힌두교와 인도 사회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사회 공동체와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쳐 이 논쟁이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어느 쪽이 주류의 위치에 섰을까요?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사회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불교에서 사회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당연히 교학 융합 즉 돈오점수의 입장이 우위에 서지요. 개인이 깨달았다 하더라도, 사회에 필요한 여러 행위 즉 사람들 간의 관계는 맞추고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